성경

루가에 의한 복음서(헤르만 헨드릭스)

유테레사 2019. 7. 18. 22:51

루가에 의한 복음서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7


1, 개요

저자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같은 사람이다. 두 책의 서문을 보면 이 사실은 명확하다. 또 이 두 책은 같은 사람, 데오필로에게 헌정되었다.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이 두 책은 루가에 의해 저술되었다 한다. 루가는 의사였으며 바오로 사도를 따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180년경 리옹의 주교였던 주교 이레네오에 의하면 바오로의 동반자였던 루가가 사도행전을 썼다고 한다. 저자를 루가라고 할 때 억지로 꿰어 맞춘 듯한 느낌을 덜 수 없다는 것이 요즈음의 정설이다. 바오로 사도가 루가라는 사람을 동반자로 데리고 다녔다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바로 이 루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라는 사실은 추측일 것이다.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저자는 바오로의 동반자(틀림없이 바오로를 흠모하던 이)일 수는 있으나 그의 저술에 관하여는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개연성이 희박하다. 비록 그의 저술에 관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가 맺었던 바오로와의 관계도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이다.

확실한 것은 이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하여 이 저술을 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교 신자였음이 분명하다 (1:4). 희랍적 사고를 하고 있던 유대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성서에 정통한 이였으며 팔레스티나 밖의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희랍어 번역 성서인 70인 역 성서의 여러 귀절을 인용할 만큼 성서에 박식한 이였을 것이다.

저술 시기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아마도 85년 부터 95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며 루가 복음서가 먼저 쓰여지고 후속편으로 사도행전이 쓰여졌다.

저술 장소

저술 장소는 명확치 않지만 팔레스티나 밖에서 쓰여졌고 희랍의 아케이아나 알렉산드리아 였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오늘날에는 이 지역 말고도 다른 지역에서 쓰여졌으리라는 설도 있다. 이렇게 명확치 않은 사실로 미루어 저술 장소가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2. 구 성

① 루가 복음서

서론 (1:1 - 4)
도입 : 탄생 설화 (1:5 - 2:52)
Ⅰ. 예수님의 구세주적 활동 (3:1 - 9:50)
A. 서론 (3:1 - 4:13)
B.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활동 ( 4:14 - 9:50)
Ⅱ. 예수님의 승천을 향한 도정 (9:51 - 24:53)
A.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9:51 - 19:44)
B. 성전에서의 가르침 (19:45 - 21:28)
C.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 (22:1 - 24:53)

② 사도 행전

Ⅰ. 예루살렘 (1:1 - 5:42)
Ⅱ. 유대아와 사마리아 (6:1 - 12:25)
Ⅲ. 세상 끝까지 (13:1 - 28:31)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두 권으로 되어 있으나 한 책이다. 이렇게 분리된 것은 신약성서를 정리 하면서 복음서가 먼저 배열토록 하기 위하여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사이에 요한 복음서를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3. 루가 복음서의 해설

(1) 서론 (1:1 - 4)

루가 복음서는 서론 부분을 4귀절로 저술했는데 희랍어 원전은 한 문장으로 구 서 성되어 있다. 이 서론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한 한 책의 서론으로 이해된다. 루가는 당시 여러 저술(예컨데 마르꼬, Q등)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하느님의 일을 기록한 이후에 저술되었으며 또한 “처음부터 목격하고 말씀의 시종이 된 사람들이 전해 준”(전승)것을 모아 저술했다. 또한 이 내용들은 초기 교회가 선포한 것들을 적어 나가는 것으로 서론을 삼았다. 그는 이렇게 전해지고 선포된 내용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순서대로” 적었는데 이때에 순서대로란 말을 연대기 적이란 뜻이 아니라 신학적인 체계를 갖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비 그리스교인들에게 영향력을 가졌던 하느님을 두려워 하던 데오필로에게 헌정된다는 사실을 서론 부분에서 기술하였다.

(2) 탄생 이야기 (1:5 - 2:52)

여러 성서학자들은 이 탄생 이야기 부분은 일종의 서론부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해석을 하고 있으나 그 보다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도입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탄생 이야기는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예수님의 탄생 기술로 보여지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구도로 보아 마태오 1 - 2에 나타난 예수님 탄생에 관한
기술을 원용하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에 드러난 내용들을 자유롭게 취사 선택하여 구약에 나오는 서술 방식을 따라 재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루가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이 탄생 사건의 세밀한 사실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탄생이 의미했던 바와 예수님의 사명을 신학적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생각된다. 이 이야기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어머니이신 마리아로 부터 전해 받은 바를 기록했으리라는 심증은 찾아보기 어렵다.

(3)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구세주적 활동 (3:1 - 9:50)

ㄱ. 서론 부분 (3:1 - 4:13)
루가 복음서의 3:1 이하는 마르꼬 복음서의 시작 부분과 같은 맥락이다.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은 네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ㄴ.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3:1 - 20)
루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그 당시 세계 현실 상황속에서 보았으며 로마황제 또한 그 당시 팔레스티나의 정치 상황(빌라도, 헤로데 등) 및 종교 상황(안나스. 가야파)에서 보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3:6, 참조 이사야서 40:5)는 말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건을 전세계적이고도 구원사적 입장에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의 진정한 회개와 참회를 소리 높여 외친다 (3:7 - 9, 참조 마태오 3:7-10). 루가가 제시하고 있는 회개와 참회는 실천에 관한 것이 었으며 (3:10, 12, 14) 나눔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실천이었다. (3:11. 가진바의 절반을 나누라는 이야기는 나눔을 통하여 평등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참조 19:8의 자캐오가 재산의 반을 나누겠다는 의지 표명과 같은 맥이다.) 이러한 진정한 나눔을 통한 참회와 회개를 세리와 군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3:12 - 14) 실제로 이들은 딴 부류가 아니라 한 부류였다.

즉 세리는 항상 세금 징수를 위하여 군인을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제국을 위하여 강압적인 세금징수를 하고 있던 착취자들로서 그 당시 착취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루가 복음서는 시작부터 압제와 이 압제에 눌린 백성들의 처지에 민감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출시키고 있다. 루가의 견해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사람이었는데 (16:16 참조) 예수님의 사명 수행 시작과 함께 성서무대에서 사라질 인물로 여겼다 (3:19 - 20).

ㄷ. 예수님의 세례 (3:2 - 22)
예수님의 세례는 그 당시의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과의 연대표시로 해석되어야 한다.(“모든 백성이 세례를 받았을 때”라는 과거형의 서술로 되어 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신 것은 세례를 받는 동안이 아니라 (마르꼬 1:9 - 11, 마태오 3:13 - 17 과 비교해 볼 것) 세례를 받으신 후이다. 즉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이다. 루가는 이러한 서술 방법을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병행적으로 쓰고 있는데, 예수님이 기도중에 성령을 받으시고 사명을 시작하신 것처럼 120명의 제자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전도 사명을 시작한 것으로 사도행전도 서술하고 있다.

ㄹ. 예수님의 족보 (3:23 - 38)
마태오와는 달리 루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서술하지 않고 인간의 최초의 선조인 아담까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루가 복음서가 지닌 보편성, 즉 인간 전체와 전체를 보는 특이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ㅁ.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 (4:1 - 13)
예수님은 아담의 자손인 모든 인간처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유혹에 직면하시게 되는데 이 관점 또한 마태오가 기술한 관점인 구약의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유혹과는 다른 인간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유혹을 받으신다. 인간이 당하는 가장 큰 유혹들은 부와 권력에 대한 유혹인데 이 두 유혹의 현실은 바로
악마적인 현실로써 제자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악마적이란 말은 이 유혹 이야기에서 악마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악마에게 “넘겨진 것이기”에 악마적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의 마지막 유혹은 마태오가 서술한 같은 유혹사화와는 달리 예루살렘에 관한 것인데 예루살렘은 더 구체적으로 성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성전과의 대결은 예수님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22:3 - 4 에서 “사탄이 유다스에게 들어가서 ” 대제관들과 합동으로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목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22:53에 나타나듯이 대제관의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을 잡아 가는 사건으로 현실화 된다.

(4)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활동 (4:14 - 9:50)

ㄱ.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선언 (4:14 - 9:5)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은 나자렛 회당에서 현실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루가의 이 서술은 마르꼬의 6:1 - 6 에 기반을 둔 것으로 나자렛 고향 방문시에 일어난 일이다. 루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첫 부분에 배열하였다. 구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61:1 - 2, 58:6) 자신의 사명이 백성들을 짓누르는 짐과 억압으로 부터 총체적인 해방을 이루어 가는데 있음을 천명하고 이 사명이 “주님의 은혜로운 해” 즉 희년의 선포에 있다고 하심으로써 종교적일뿐 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적인 현실에 대한 도전임을 암시 하셨다.

청중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나 (4:22) 이어서 구약의 예언자인 엘리야(열왕기 상 17:7 -16)와 엘리사(열왕기 하 5:1 - 9)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사명 또한 소외된 이들, 즉 가난한 과부와 사회에서 밀려난 나환자들과 같은 이들에게서 이루어 지리라는 소리를 듣자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와 자신들이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 한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서 가난한 이들과 압제 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의 여정을 시작하신다.

ㄴ. 갈릴래아에서의 활동 (4:31 - 9:50)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모든 고을에서 (4:43)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 치유를 베푸신다. 그러나 한번 지나간 곳은 다시 들르지 않고 항상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신다. 루가는 마르꼬가 기술한 것과 유사한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들르셨던 장소의 이름은 기록치 않았다.
단지 한가지 예외는 가파르나움 뿐이다. “평지에서” (6:17) 예수님은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하시는데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이들은 모두 궁핍한 사람이라는 한 부류를 다르게 표현한 뜻), 박해 받는 사람 (6:20 - 22) 들을 행복선언에 포함시키고 그 반대되는 이들은 불행선언으로 갈라놓으신다(6:24 - 26).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는 뜻은 그들이 당하는 가난이 좋은 것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 이와 같은 변혁속에서 이들이 첫번째로 복을 입기 때문이다. 희랍 로마세계라는 맥락에서 두개의 극명한 다른 두 가치를 대비시켜서 강조점을 찾는 기술 방법을 쓴 전형적인 예인데 바로 이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은 루가에게서 아주 극명한 형태로 드러난다.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본격적인 전도 여행을 시작하는 중간에 예수님의 거룩한 변용을 삽입시켰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세상을) 떠나가실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떠나감이란 바로 출애굽 사건을 의미하는데 이후에 기록된 전
도 여행은 예수님의 출애굽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 또한 교회에 해당하는 의미도 가진다.

(5) 예수님의 승천을 향한 도정 (9:51 - 24:53)

이 기록의 전체적인 맥락은 9:51 첫 문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예수께서 하늘에 맞아 들여질 날이 다가오자..”란 말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기록 부분의 전체 지향점은 승천이다. (24:50 - 53) 또한 이 부분은 복음서 전체로 보아 둘째번이며 마지막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시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9:51 - 19:44) ㈁ 성전에서의 가르침(19:45 - 21:38) ㈂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 (22:1 - 24:53) 으로 구성되어 있다.

ㄱ.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9:51 - 19:44)
루가 복음 4:30에도 여행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초기여행은 주로 갈릴래아 지역에서의 여행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여행은 전자와 다른 목적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여행으로 구별할 수 있다. 즉 전자의 초기 여행은 뚜렷한 여행의 목적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후자의 여행은 예루살렘이라는 뚜렷한 목적지와 착실한 준비를 한 여행이라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올라 가기로 마음을 굳히셨다“란 기록과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을 보내어 그들이 그분을 모실 준비를 하셨다“라는 기록은 이를 의미한다. 이 여행의 뚜렷한 방향과 의도는 계속 반복되어 기록되었는데 13:22.33, 17:11, 19:28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서 학자들은 이 여행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해 왔는데 이 여행을 기록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날 때 많은 추종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을 했다. 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추종)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 과정을 밟아 가면서 제자들로서 양성되었던 것이다. 루가는 이에 촛점을 맞추어 제자 개개인 뿐만 아니라 제자(추종자)들의 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의 양성 훈련 계획이라는 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됨의 특성은 무엇인가 ? (9:57 - 62)
예수께서는 우선 스승을 따르는 길이란 스승이 가는 길이 어떠한 길이든지 따라가야 하기에 삶에 있어서 안전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즉 이말은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자는 예수가 가는 길이 험난한 길이기에 이를 감수해야하지 개인의 안위나 편함이나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자신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신다. “인자는 머리 기댈 곳 조차 없다” (9:58). 또한 제자된 이들은 오로지 하느님 나라만 생각할 것이지 다는 여타의 것을 염두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고 가르친다. “누구든지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9:62). 심지어는 아버지의 장사를 맞더라도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의 장사를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 떠나라고까지 말씀하신다 (9:60)

이렇게 양성될 제자들 70명을 파견하신다 (10:1 - 12)
이와 같은 제자됨의 특성을 배우도록 일흔 두명을 파견하시면서 바로 이런 삶의 안전이 확보되지 못한 삶의 체험을 하도록 하신다. (10:3) 이런 삶의 체험을 위하여는 돈주머니도, 자루도, 신발도 들고 다니지 말 것이며 사람들과의 접촉도 하지말 것을 명령하신다 (10:4). 동양 종교에서 오늘날에도 발견할 수 있는 탁발 수행승의 고행과 수행, 방랑 생활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 10:25 - 37).
이 이야기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서 시작되는데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처지에 있는 사람이 흔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런 이들은 흔히 편한 삶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10:29). 이에 예수님은 하나의 예화를 든다. 이것이 저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예화이다. (10:30 - 37) 예수님은 이 예화를 마치면서 율법학자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이 세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 (10:36) 이 예수님의 질문의 핵심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질문에 있지 않고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인가 ?”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웃이 된다는 것은 이론적인 이웃의 정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행위와 실천에 있음을 알 게 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도록 달려갈 수 있는 자 만이 진정한 이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실천하는 자는 이웃을 발견할 수 있는 자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계속 “나의 이웃이 누구일까 ?”라고 이론적인 질문만 할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차원을 이야기 한다. (10:38 - 42)
즉 착한 사마리아인이 피해를 입어 이의 구체적 필요에 응답함으로써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보여 주었듯이 마르타도 사람을 맞아 들여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준다. 마르타는 (착한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을 경청하는 것에서부터 실천이 뒤따라 나왔어야 함을 예수님은 환기시킨다. 마리아와 마르타를 비교해 본다면 마리아는 말을 들을 것도 없이 무엇을 행하고 있지만 그녀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은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복됩니다” (11:28) 라는 말씀에서 나오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모든 행동의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이런 뜻에서 제자가 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마르타가 못한 부분) 또 말씀에 따라 행동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마리아가 못한 부분). 즉. 마리아와 마르타가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하여는 이 부족함이 채워져야만 하겠기에 예수님은 이 작은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흔히 사람들은 이 성경 귀절을 놓고 제자들의 활동적 삶과 관상적 삶을 구분하고 있으나 예수님의 의도는 이 두가지 차원이 함께 하는 삶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다. 이 두가지 삶은 선택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제자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기도이다 (11:1 - 13)
예수님은 이 부분을 주의 기도 속에서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시를 드러낼 수 있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1:1)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11:2 - 4). 또한 기도에 항구 할 것을 덧 붙이신다 (11:5 - 8, 9 - 13).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와 성령의 선물이 긴밀한 상호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11:13)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이야기 ( 12:13 - 21 )는 예수님의 전도 여행중에 나타나는 다섯개의 이야기중 첫번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소유에 관한 태도를 설명하는 다른 이야기들 (예컨데 12:22 - 34, 14:25.33)과는 달리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 부자는 재물 밖에 모르는 무신론자와 같은 행위를 하는 이를 가르킨다 (예컨데 시편 14:1 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진 이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 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이들은 갑자기 떼 부자가 되는 일에는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추호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어서 치유, 가르침, 큰 잔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4:1 - 24).
14:1 - 24 에서 예수님은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식사를 하러 가셨다” (여기서 지도자란 말은 8:41 에서의 뜻과는 달리 루가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안식일에 치유를 베풀었을때 긴장과 갈등이 나타난다 (14:2 - 6). 이 식사에 초대 받은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14:7 - 11) 집 주인에게도 한 말씀 하시는데 (14:12 - 13)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 불구자들 , 절름발이들, 소경과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가난한 이들은 원래 당시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로서 취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도 이에 포함시키셨다. 큰 잔치에서의 이야기에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부자와 같이 초대는 받았지만 초대를 거절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특히 14:18 - 9 는 초대를 거절하는 이들의 이유를 직시하고 있다. 반면에 초대에 응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 이방인들 이었다. 여기서 “고을의 거리와 골목” (14:21)은 유대 사람을 가르키고 “행길과 울타리 쪽” (14:23)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마태오 22:1 - 10에서는 초대를 거절한 이들은 유대 사람들이고 초대에 응한 이들은 이방인들로 되어 있다. 루가 14:25 - 35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치루어야 할 댓가와 희생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제자 됨이 어려운 일이며 이와 같은 각오와 결단이 없이는 참다운 제자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루가 15장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 받고 사회에서 천대 받는 이들을 돌보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설명인데 잃었던 양의 비유 (15:4 - 7), 잃었던 은전의 비유 (15:8 - 10) 그리고 잃었던 아들에 관한 비유는 루가 복음서의 백미로 예수님이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있던 이들을 감싸 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하던 종교 및 정치와 사회 지도자들을 향하여 한 비유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난에 대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예컨데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이를 의미한다.) 이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은 사회에서 버려진 이들에게 우선적인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느님 나라가 구현되는 데에 장애물은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아들이 아니라 이들을 받아 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큰 아들과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잃어버려진 이들이 하느님 나라 잔치의 주민들로서의 영광을 받은 일을 불평하거나, 비난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이다.

루가 복음 16장에서 18장은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장애 요소와 긍정적 요소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데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 나라의 임박성을 확신하면서 이 부분을 기록하였다. 임박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가져올 갈등, 또한 이로 비롯된 열망,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작은 양떼로서” (12:32) 이 세상 종말에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면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아야 할 여러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자가 올때에 땅위에서 과연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 (18:8)는 이를 웅변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루가는 세가지 중요한 사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희랍 로마 문명 사회에서 첨예화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세상의 부와 권력에 대하여 제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 그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백성으로 남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설명한다. 물론 이 세가지 중요한 사안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사안인데 루가는 세 사안을 통하여 이 문제를 극명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16:1 - 13) 부자와 가난한 나자로의 비유를 통하여는 재물에 관한 것을, 재판관의 비유 (18:1 - 8)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9 - 14)를 통하여는 기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에 자세히 살펴본다.

재물 (16:1 - 13)에 관한 이야기는 불의한 청지기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복원시킨 것인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유행하던 경구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루가 자신의 말을 덧 붙였다 (16:8 - 13).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갈등에 관한 비유로 오랜동안 편안한 생활을 해 오던 청지기가 갑자기 위기를 맞게되는데 아마도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 봉착한 청지기는 우선 사태를 심각히 분석하며 여러가지 타개책을 궁리한 끝에 위기를 넘길 방도를 찾아 내어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 이 점에서 청지기는 “슬기로운  처신”에 대하여 주인으로 부터 칭찬을 받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이들은 실제로 하느님 나라의 임박성을 느끼고 위기감을 가졌던 이들로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처할 방안을 슬기롭게 찾아 내야 한다는 점을 깨우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제대로된 결정을 하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염려를 하는 이들보다는 이 청지기 처럼 약은 자들이 재빠르게 사태를 감지하고 결단을 내리고 있다 (16:8) . 루가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단순히 위기에 처한 상황과 이에 관한 대처의 슬기로움과 약삭 빠름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가져오게 한 재물의 소유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다. 주인의 재산 관리를 맡은 청지기는 위기를 맞게 되자 자기에게 맡겨진 재물을 포기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재물 포기로 득을 보게 된 사람들이 자기가 자리를 물러 났을때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슬기로운 제자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이런 방식으로 포기함으로써 위기의 순간인 죽음이 올 때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 나라를 확보하여 재물을 나눔으로써 은혜를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슬기로움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16:9). 이런 관점에서 재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제자됨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된다.

제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다(16:10).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느님을 선택하던가 하느님을 대신한다고 믿는 맘몬을 선택하던가 하는, 극단적인 선택에 항상 직면하는 이들이다. (마태오 6:24 참조)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16:19 - 31)에서는 이러한 극단적 선택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16:25절 참조). 이는 이미 “마리아의 노래” (1:51 - 53)와 행복과 불행선언 (6:20 - 26) 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부자와 라자로를 갈라 놓은 “큰 구렁텅이”는 부자가 만든 것이다. 부자는 전 생애를 통하여 자신과 “대문 곁에” 누워있는 라자로 사이에 오갈 수 없는 깊은 간격을 스스로 만들어 왔다. 이제 죽음은 이 모든 것의 결말을 드러나게 한다. 이 결말은 바로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의 사태를 몰고 온다. 만일 이와 같은 결말이 현실화 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부자들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된다.

믿음은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비록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일지라도 “불가능”을 “ 가능”으로 변화시킨다. 마찬가지로 회개하는 이에게는 하루에 일곱번도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공동체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할 수 있는 실천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17:7 - 10) 이러한 믿음은 인간을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단순히 육체적 치유를 넘어선 믿음이다. (17:11 - 19) 열명의 나환자가 치유를 받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17:19)란 말을 들었던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기도에 대하여 18:1 - 18에는
성가심을 당한 재판관이 과부의 요구에 굴복하고 만다는 예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도 끈질긴 호소에는 어찌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끈질긴 과부가 재판관에게 끊이지 않고 호소하듯이 제자된 이들도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 하면 인자가 올 때 믿음이 땅 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뜻이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는 서로 반대되는 모습이 드러나는데 (18:9 - 14)
실제로 바리사이는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나는”이란 말이 다섯번이나 나온 것을 보아서 하느님이나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간구한다기 보다는 제 자랑하는데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세리는 비록 짧은 표현을 쓰긴 했어도 자신이 올리고 싶은 기도의 전부를 한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일에 관한 중얼거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전달되는 그러한 기도이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루가는 다시 재물과 관련된 이야기로 돌아 가는 데 이 이야기는 어느 지도자에 관한 것이다 (18:18 - 30, 마르꼬 10:17 -31). 루가는 이 이야기를 마르꼬 복음서에서 따왔는데 이를 더욱 급진적으로 윤색하였다. 즉 마르꼬에서는 예수님께서 젋은이를 대견스럽게 여긴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루가에는 이런 관점이 생략되었다.

또한 마르꼬는 가진 것을 팔아서 주라고 (10:21) 기록을 했으나 루가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계속 나누어 주라는 식으로 기록하여 삶의 양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마르꼬는 이 젊은이가 슬픔에 잠겨물러가고 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미래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루가는 이 지도자는 물러가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면서 단지 이 말씀을 듣고 몹시 근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매우 부유했던 때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그를 보며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있다. 루가는 이를 현재적이고도 단정적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부자는 스스로 들어가기 힘들지만 (18:25) 그러나 부자들에게도 기회는 마련되는데 그 기회는 오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기회 뿐이다. (18:27)

그렇다면 이런 기회는 어떤 기회인가 ? 이 이야기는 19:1 - 10 에 나오는 자캐오의 이야기 이다. 자캐오는 부자로써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심으로써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된 전형이다 (19:8).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들어 가는데 그가 반드시 했어야 할 일,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 지도록 한 일은 바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선언을 하는 일이었다. (3:11 참조) 그러나 그가 이러한 결단을 내릴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치유가 있었기 때문이다.이 소경의 치유는 바로 자캐오의 이야기 앞에 배열되었는데 루가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18:35 - 43)

예수님은 여행을 계속하시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19:28 - 38)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다 (19:39 - 44). 그리고는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의 성전에 마침내 도착하신다. (19:45)

ㄴ. 성전에서의 가르침 (19:45 - 21:38)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고 난 다음 (19:45 - 48)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 치신다. (20:1, 21:37) 이제 그 분은 아버지의 집에서 (2:49 참조) 가르치셨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원하시던 모든 것을 가르치실 수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당시의 지도자, 특히 성전에서의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긴장과 갈등을 자아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율사들과의 논쟁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한 비난을 늦추지 않으셨는데 이들의 위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고 또한 겉 꾸며 길게 기도하는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0:47) 이 비난 후에 가난한 과부에 관한 이야기를 루가는 배열하였다. 이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닢이 전 재산 이었는데 그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헌금함에 넣었다 (21:1 - 4)

이 성전에서의 공적인 가르침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21:5 - 7)과 종말에 관한 가르침(21:8 - 36)으로 끝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전 밖에서는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가 반대자들 사이에서 착착 진행이 된다. 루가는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자들의 음모를 병행 서술함으로써 긴장과 갈등이 점차 고조되어 마지막 대결로 치닫는 가정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ㄷ. 수난, 죽음, 부활, 승천 (22:1 - 24:53)
이 부분은 이스가리옷 유다의 배반으로 부터 시작된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다가 실패한 악마는 “다음 기회까지 그 분에게서 떠나 있었는데“ (4:13) 이제 악마가 “이스가리옷 유다에게 들어간” (22:3) 것이다. 물론 이스가리옷 유다는 당시 지배세력을 대표하던 대제관들과 수위대장들로 부터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하느님 대신 맘몬을 택한 것이다. (16:13 참조)

이어서 최후의 만찬이 나온다 (22:14 - 28). 예수는 이 최후의 만찬을 친구들과의 고별 식사로 지냈다. 마르꼬와 마태오 복음서에는 고별사가 없는데 루가는 고별사를 넣었고 이 서술의 마지막은 칼 두자루라는 이상스러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칼을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 처럼 이사야서 53:12의 기록과 연관이 있는데 “그는 무법자들과 함께 헤아려 졌다”는 이 기록은 그 당시 희랍 로마 사회에서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포위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단죄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재산인 겉옷까지라도 팔아서 칼을 사 그들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루가의 관점이 드러난 기록이다. 예루살렘 멸망시에 가진자들은 재산을 싸가지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갈 수 있으나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기에 칼을 마련하여서라도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했었다. 이들이 칼을 든다면 이들은 “무법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데 “무법자들과 함께 헤아려 졌다”는 말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할 수 없이 무기를 들 때, 예수님도 그들 속에 함께 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게쎄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루가의 관점을 이야기한다 (22:40 - 46). 이 귀절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다섯번이나 나온다. 제자들이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기도의 힘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체포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최고의회에서의 심문이 계속 서술되고 있는데 예수님이 잡히신 후 (22:47 - 53) 베드로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 말은 예수님의 구세주 신원 부인이 아니라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부인이다. 그러나 즉시 뉘우친다 (22:62). 결국 예수님은 최고 회의에 끌려나가고 단죄를 받는다(22:66 - 71).

이어서 예수님은 당시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려가는데 고발사유는 세가지이다 (23:2 - 25). 즉 첫째로 예수님은 ‘민족 이간자’로 고발되는데 민족 이간자란 뜻은 국가 안보를 위협한 이라는 뜻이며 이때의 국가는 로마 제국에 편입된 팔레스티나, 즉 로마 제국을 말한다. 결국 이 고발사유는 정치적인 것이고 팔레스티나 편에서는 종교적인 것이다. 둘째 고발 사유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가로 막은 일인데 이는 “경제적 독립”을 의미하지만 로마 반역이라는 정치적 의미도 갖는다. 이와 같은 일을 하던 이들이 당시에는 “열혈당”이라는 무장 독립 게릴라들이었다. 마지막 고발 사유는 자칭 구세주인 왕이라는 사칭으로 이 또한 로마 제국에 반역하는 정치적인 행동이며 동시에 팔레스티나 편에서는 종교적인 신성모독행위였다. 그 당시 스스로 구세주 왕으로 자칭하던 여러 혁명지도자들이 있었다.

주후 6년 세포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던 혁명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갈릴래아의 유다스였다. 그는 후에 로마의 바로 군단에게 패하였다. 실제로 빌라도와 헤로데는 대사제와 지도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예수님으로 부터 아무런 죄목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어서 십자가상의 죽음이 나온다 (23:26 - 49).
예수님은 시외로 끌려 나가는데 키레네의 시몬 뿐 아니라 많은 군중이 그를 따라 간다. 예수님은 다른 두 “악인”과 함께 끌려간다. 여기서 “악인” (또는 범죄자)이란 말은 루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로마에 반항하던 이들에게 붙여진 말이다 (23:32). 백성들이 침묵속에서 보고 있는 가운데 지도자들과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한다. (22:25 - 36) “악인”중 하나가 예수께 얼굴을 돌리자 예수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23:43). 성전 휘장은 하느님과 범죄한 인간을 갈라 놓는 상징물인데 이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인간은 다시 하느님께 다가 갈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23:45). 예수님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운명하시는데 이 부르짖음은 고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신다.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첫번째 인간은 아마도 같은 십자가 형을 받았던 악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금전에 예수님으로 부터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확인되었는데 “정말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 었다” (23:47). 이 말은 지혜서 2:1 - 20 에 나타난 의로운 사람을 상기시키는데 의인은 항상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 편에 섬으로써 불의한 권력을 잡은 이들로 부터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이들이다. 이 모든 일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루어 졌다 (23:48, 23:27). 이 십자가 처형의 전 과정은 이름 없는 수 많은 이들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루가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왜냐하면 그 수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이방인들 까지도 이 중요한 사건의 증인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십자가 형의 과정에서 두번에 걸친 기도에 관한 기록을 삽입함으로써 (23:34, 46) 이 십자가형 전체를 기도와 아버지께 대한 의탁으로 승화시켰다.

여인들이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이는 베드로에 의하여 확인됨으로써 부활사화가 시작된다 (24:1 - 53). 또한 엠마오로가던 두 제자들은 동행하던 이가 빵을 떼고 성서에 관한 설명을 하자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아보게 된다 (24:13 - 35).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여 죄를 용서하고 회개를 촉구토록한다 (24:36 - 49).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24:50 - 53) 루가 복음서의 둘째 부분이며 전체 복음서의 결론을 내린다.

* * 사도행전에 관한 간단한 내용 분석 * *

루가 저술의 두번째 책은 사도행전인데 사도행전 전체 내용에 관한 요약은 1:8 에 기술 되어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 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 첫째 부분은 1:1 - 5:42 로 예루살렘에 있었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관한 기록이고 ㈁ 둘째 부분은 6:1 - 12:25 로 주로 유대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에서 활동하신 스테파노, 필립보, 베드로의 전도를 다루고 있고 ㈂ 세째로 13:1 - 28:31 는 주로 바울로의 전도 여행을 기록했는데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 였던 로마까지의 전도 여행이 주제로 되어 있다. 루가 복음서는 사도행전이라는 두번째 책의 바울로의 로마에서의 복음 선포로 끝을 맺는다.

(6)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요약
루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기술하였다. 사도행전은 그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한 예루살렘으로 부터 로마로까지의 전도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도 이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세상 끝날때 까지” 여행을 하고 계신 것이기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여정이다. 이 여정은 세상 끝까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이 전해지고 최종적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끝날 여정이다. 루가가 이러한 예수님과 교회의 선교과정을 여행의 여정으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바로 이길이 주님이 가셨던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 그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주님의 길을 가면서 세상 끝날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제자만이 주님의 길을 올바로 따라 가는 제자들이다.

4. 루가 복음서의 중요한 주제와 특징

㈀ 보편주의 : 이방인을 위한 복음

루가는 비 팔레스티나 지역에 형성된 비 유대인 그리스도인 교회를 향하여 기 록을 했기 때문에 복음의 보편적 관점을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루가가 의미한 이 보편적 관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루가의 기록이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전할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을 향한 보편성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구원사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역할까지를 간과한 것은 아니란 점이다. 확실히 루가의 기록은 시작부터 구약의 성서에 따라 작성되었으며 선교 명령에 동의한 이방인들은 이 구원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록되어갔다. (예컨데 2:30 - 32, 3:6 참조)

구원에의 참여와 나눔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하느님의 약속에의 참여와 나눔이기에 이스라엘적인 관점을 도외시 하지 않는다. (14:21 - 23 참조).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성서에 약속된 구원사건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성취된 연후라야 한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성취는 사도행전 첫 장에서 보았듯이 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으로 들어난다.

“먼저 이스라엘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이 관점은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복음 선포에서 나온 전략적인 방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루가는 많은 유대인의 참여를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선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이들이 하느님의 잃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단순히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구원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을 이어 받은 사람들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 학자들은 최초로 초기교회에 들어온 비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들은 유대교에 매력을 느꼈으면서도 개종자와는 달리 할례나 식품 금기 등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에 그리스도교로 들어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이루스와 크르넬리우스가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이들이다.

㈁ 구원자 : 연민과 자비의 복음

복음서는 각기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따라 내용 또한 특징을 지닌다. 이런 특성과 특징은 서술방법에 있어서 복음사가들이 어떤 주님의 모습을 그려내느냐에 따라 나타난다. 루가에게 주님은 구원자로 서술된다. “여러분을 위해 구원자가 나셨으니 ...” (2:11) 구원자라는 단어가 계속 쓰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할례시에 이름이 주어진 것을 기록한 것은 구원자라는 맥락으로 해석된다. “할례를 베풀게 되자 아기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아기가 모태에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주었던 이름이다” (2:21). 이때 주어진 이름 예수는 하느님 야훼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루가가 그려낸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따뜻한 정과 연민과 자비를 지니고 모든것을 용서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한 회개가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24:47) 라는 성서의 기록을 성취하는 분이다. 루가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15:3 - 7) 잃어버린 은전(15:8 - 10)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15:11 - 32)의 이야기를 통하여 루가는 하느님의 자비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당시 지도자들의 굳은 마음을 예수께서 깨뜨려 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예화는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유명한 예화이다.

“그 고을에서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 (7:37)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루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또한 마음이 부드러워진 악인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23:43)라는 예수님의 모습, 자신을 처형하는 이들에 대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23:34)라는 모습등에서 자비로운 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베드로의 부인에 대하여 루가만이 주님이 베드로를 눈여겨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윽한 눈으로 연민과 용서에 찬 눈길을 보내시는 주님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22:61). 복음서 여기저기에서 용서를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루가 복음서의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루가의 복음서는 용서의 복음서라 할 만하다.

루가가 묘사한 예수님의 연민과 자비는 우선 불행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자비에 찬 행동이 뒤따른다. 마르꼬나 마태오에 비하여 루가는 이와 같은 모습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참고로 루가 8:40 - 56과 마르꼬 5:21 - 43을 비교해 볼것, 특히 루가 8:4 - 42과 마르꼬 5:22 -23을 비교할 것). 또한 루가 7:11 - 17에도 나오듯이 하나뿐인 아이를 잃어 버린 안타까운 처지가 묘사된다. 루가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여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언급을 하고 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아주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루가의 이런 관점은 놀랍다. 예컨데 엘리사벳의 역활, 특히 탄생이야기 가운데 마리아에 대한 많은 언급등은 놀라운 관점이다. 몇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예 여성들로 되어 있기도 하고 (7:11 - 17, 15:8 - 10) 복음서중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제자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8:2 - 3)

㈂ 성령에 대한 복음

루가 복음서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은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의 수태 (1:15, 8), 아버지 즈가리야 (1:67), 어머니 엘리사벳 (1:24), 시므온 (2:27), 안나 (2:36) 이 모든 인물들을 거느리는 성령은 예언의 성령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성령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적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1:35은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 오실 터이니,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싸 주실 것입니다”란 표현은 성령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을 달고 있다. 여기서 성령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묘사되고 있어 루가는 자신보다도 성령의 능력과 활동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 루가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성령과 함께 활동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시 기도 중에 성령이 예수께 내려와 (3:21 - 22) 예수님은 “영에 의하여 ... 인도 되시어 ...” (4:1) 광야로 가신다. 예수님은 또한 “영의 능력을 지니시고 갈릴래아로 가” (4:14)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이때 첫번 공적 선언의 서두는 이사야서의 61:1을 인용하며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 로 되어 있다 (4:18)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성령의 표지하에 진행되었으며 예수님의 언행은 나자렛의 회당에서 선포된 선언의 맥락에서 보아야 하기에 성령의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 루가 복음서의 서두에는 성령이 자주 등장하나 뒷 부분에는 적게 기록되어 있다. 그럴지라도 성령에 관한 중요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예컨데 10:21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명이 나서 말씀하신 것이 나타난다. 11:13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시는 이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성령을 주시겠습니까 ?”라는 언급이 나온다. 성령강림이후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에 의하여 교회에 임하게 되어 교회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사도행전 1:8,2:4)

㈃ 기도에 대한 복음

루가 복음서는 또한 기도의 복음서라 할 수 있는데 가장 훌륭한 기도의 전형은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 준 기도이다. 물론 이점은 마르꼬와 마태오에도 나타나고 있긴 하다. 마태오와 마르꼬는 빵의 기적 이후 기도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꼬 6:46, 마태오 14:23). 그리고 공관복음 모두 예수님이 게세마니에서 기도한 것을 기록했다. (마르고 14:32 - 42, 마태오 26:36 - 46, 루가 22:40 - 46)

그러나 루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기록을 여덟번이나 더 언급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사건 전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했다. 예컨데 세례때 (3:21), 광야에서 (5:16), 제자를 선택하기 전날 밤새도록 기도를 하셨으며 (6:12), 베드로의 고백전 (9:28),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때 (11:1) 베드로를 위한 기도 (22:32), 십자가상에서 사형집행인들을 위하여 (23:24),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상 죽음이 최고의 기도 (23:46)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는데 억지를 부리는 친구처럼 끊임없이 기도 할 것을 (11:5 - 13), 재판관을 성가시게 만든 과부 처럼 (18:1 - 8),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에서 보듯이 (18:9 - 14), 성령을 받기 위하여 (1:13) 그리고 항상 (21:36) 기도 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도 기도에 대한 기록이 계속 나오고 있다.

㈄ 기쁨과 평화의 복음

구세주의 오심은 기쁨을 가져오는데 루가는 이 점을 특별히 묘사했다 (1:14, 2:10). 기쁨에 관한한 적어도 두가지 연관된 이야기가 있으며 여행이야기 안에서만 해도 기쁨이 주제가 된 이야기가 적어도 열개는 된다. 즐거움과 기쁨은 평화를 불러 오는데 제자들은 평화를 주러 파견된다 (10:5 - 6). 천사들의 노래는 후에 제자들과 예수 추종자들에게서도 나오는데 평화의 왕으로, 승리자로서 예루살렘 입성시(19:38) 나오지만, 이 도시는 평화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19:42).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같은 평화를 주고 있는데 (24:36) 이 평화를 받은 제자들은 전 세계를 향하여 이 평화를 전달토록 파견된다 (사도행전 7:26, 9:31, 15:33).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평화와 기쁨은 기도의 열매로써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인격적 일치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주님의 길

루가는 구원사의 지속을 길 또는 여정으로 파악한듯 하다.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구원사의 여러 단계들이 하느님이 정하시는 때와 역할을 담당한 이들의 여정에 관련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도 길로써 묘사되고 있는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를 가야만 한다” (13:33)라고 기록하였고, “인자는 정해진 대로 갑니다” (22:22)라고 기술하였다. 거룩한 변용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면서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출애굽”이라는 여정을 말한다 (9:21). 그리스도교 운동도 길로 표현하고 있다 (사도행전 9:2, 19:9, 19:23, 22:4, 24:14, 24:22). 제자됨 또한 여행으로 묘사된다 (사도행전 1:21). 사도 바울로가 밀레도스에서 고별사를 하면서 자신의 전도 사명을 여행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제자는 당연히 여행하는 자들로서 한곳에 머물러서 안주해서는 안되었다. 주님의 길은 예수께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가신 길을 의미한다. 루가 복음서를 쓴 저자는 이 길을 하느님 구원 목적의 구체적 실현으로 보았다. 즉 사람의 아들, 예수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간 것이다. (22:22) 성령은 이 길을 인도하였으며 (루가 4:1, 4:14, 사도행전 6:6 - 10), 이 인도를 받아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실 수 있었다. 이제 같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도구가 되게 하신다.

㈆ 가난한 이들의 복음

루가 복음서를 현대적인 용어로 규정한다면 “사회적”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탄생을 보면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 났다. 루가 2:24에 기록되었듯이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집 비둘기 새끼 두마리” 밖에는 성전에 바칠 수 없었다 (레위기 12:6 참조). 정결례에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바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루가가 세례자 요한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긴 것을 보면 “사회적”성격을 지닌 이였음이 명백하다. 이 기록을 통하여 루가는 나눔을 강조하는데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란 표현을 보아도 그렇다 (3:11). 또한 세리와 군인들도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요한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3:10 -14). 특별히 이사야서를 인용한 예수님의 자기 사명 선언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사회적 성격을 뚜렷히 부각시킨 예이다 (4:18 - 19). 또한 행복선언과 불행선언 (6:20 - 26)은 마태오와는 달리 사회적 성격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마태오는 이 같은 선언에서 “영으로 가난한 사람 (마태오 5:3)”이란 표현을 썼으나 루가는 “가난한 사람 (루가 6:21)”이란 직설적 표현을 쓰고 있다. 또한 마태오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태오 6:21) 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같은 맥락의 행복선언에서 마태오는 “가난”과 “굶주림”을 영성화된 은유로 쓰나 루가는 실제로 “가난함”과 “굶주림”이란 현실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부자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과 압제속에서 사는 이들은 돌보아 주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택하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에서 이다. 즉 가난한 이들은 보호자가 없기에 하느님이 보호자로 나서시기로 했다는 의미이다.

루가는 또한 재물과 권력의 위험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점에서 다른 복음사가보다 더욱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유혹사화에서(4:1-13) 루가는 지상왕국에서의 재물과 권력에 대한 유혹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 때의 부와 권력은 우선적으로 로마제국의 부와 권력을 말하는 것이다. 루가는 이를 악마적 현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4:6-7).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계획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자유케 하는데 있었다.(4:18) 이를 위하여 예수 추종자들은 당연히 모든 재물과 권력을 포기하여야만 하였다(5:11,28). 하느님과 이웃을 외면한 부자는 이런 맥락에서 “어리석은 자”로 지칭될 수 밖에 없었다(12:20). 당신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이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라 예수님은 단언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이처럼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14:33). 이 가르침은 부자와 라자로(16:19-31) 부자 지도자(18:18-30) 및 자캐오(19:1-10)에게서 명백히 드러난다.

루가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들의 폭력적 혁명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역사에 관여하여 권세있는 자들을 굴복시켜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았던 루가는 그리스도가 추구하고자 했던 바가 이 점이라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예수가 이러한 관점을 설파했을 때 현세적 구세주를 원했던 많은 이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었다(4:29). 예수님은 이들을 피하여 몸을 감추신다(4:30). 루가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무기를 들고 폭력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이들과 함께, 또 이들을 위하여 다른 대안으로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까지 말한다(22:35-38). 그렇기에 그는 “무법자”로 간주되기도 했다(22:37). 예수님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이들 가운데서 십자형을 받음으로써 그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함께 하신 것이다.

십자가 형중 십자가에 달린 한“범죄자”는 애초의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예수님께 동조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 영광을 받았다(23:43).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가난한 이, 의로운 이(23:47)로 새로이 부활하셨으며 그분은 가난한 이, 압제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게 된 것이다(이사야 53:11, 지혜서 2:1-20).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하고 죽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이 사명, 즉 가난한 이들을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해야만 한다(4:18 참조). 그리스도는 이 추종자들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새로 태어난 이로서 자신의 여정을 이 세상에서 계속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 편에서서 살아가야한다.이들에게 중 립은 없다. 두가지 선택중 하나일 뿐이다. 세상의 권력자 편에 서는 침묵의 삶을 살던가 아니면 힘없는 이들 편에 서서 해방의 기쁜 소식을 소리높이 선포하는 일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은 폭력적인 혁명가가 되서는 아니된다. 폭력적인 혁명가들은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폭력을 통하여서 해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가난하고 고통받고 압제받는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이 이루어짐을 깨우쳐야 한다. 루가에게 그리스도는 현세적 용어로 “평화주의자”였다. 이점은 다른 어느 복음서 보다도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져야 할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고 싸워가는 이들을 단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가 택하신 자기봉헌의 길,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헌신을 해야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가 소위 폭력혁명가인 “범죄자”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바는 이 세상에서 인간만의 폭력적인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의 형제성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해방의 역사속에서 하느님의 개입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결정적 완성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스도인은 이를 믿고 다만 하느님 나라에 헌신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루가는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요 요점

☞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같은 사람이다. 저술시기는 주후 85년부터 95년 사이이며 루가 복음서가 먼저, 그리고 후속 편으로 사도행전이 쓰여졌다.
☞ 루가 복음서는 서론(1-4장), 탄생 이야기(1-2장),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구세주적 활동(3-9장), 승천을 향한 도정(9-24장)으로 구성된다.

루가 복음서의 주요 주제 :
◉ 루가는 비팔레스티나 지역에 형성된 비유대인 그리스도인 교회를 향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복음의 보편적 관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루가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뜻한 정과 연민과 자비를 지니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한 회개가 선포된다는 성서의 기록을 성취하는 분이다.

루가 복음의 또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성령에 대한 복음이라는 점이다. 이 복음서 1, 2장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성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수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시므온, 안나등). 그리고 루가는 예수님을 성령과 함께 활동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또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에 의하여 교회에 임하고 교회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 루가 복음서는 또한 기도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훌륭한 기도의 전형은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 준 기도이다. 사도행전에도 기도에 대한 기록이 계속 나온다.
◉ 또한 루가 복음서는 기쁨과 평화의 복음이다. 그런데 이 평화와 기쁨은 기도의 열매로써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인격적 일치속에서만 가능하다.
◉ 루가는 구원사의 지속을 길 또는 여정으로 파악한듯 하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당연히 여행하는 자들로서 한 곳에 머물러 안주해서는 안되었다. 예수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간 것이며 성령은 이 길을 인도하였고, 이 인도를 받아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실 수 있었다. 이제 같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여 하느님 구원 계획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 루가 복음서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 사회적 복음이라 할 수 있다. 루가 복음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부자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과 압제속에서 사는 이들은 돌보아 주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택하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에서이다. 즉 가난한 이들은 보호자가 없기에 하느님이 보호자로 나서시기로 했다는 의미이다.
◉ 루가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들의 폭력적 혁명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 역사에 관여하여 권세있는 자들을 굴복시켜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가 택하신 자기봉헌의 길,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헌신을 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바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성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해방의 역사로써 이것은 하느님의 개입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사실이다. 그리고 이 결정적 완성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서 이루어지기에 그리스도인은 이를 믿고 하느님 나라에 헌신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루가는 제시한다.

[출처/참사람되어 단행본,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 헤르만 헨드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