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헤르만 헨드릭스)

유테레사 2019. 7. 18. 22:55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6


1. 개 요

저 자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는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태오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또한 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2세기말경부터 사도 마태오가 이 복음서의 저자라는 전승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즉 골지방(지금의 프랑스)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오는 “마태오가 히브리어로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썼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둘째로 이 복음서는 히브리어(또는 아라메아어)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복음서의 저자는 희랍어를 알고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였을 것이며 그는 다른 많은 사람과 같이 예수님을 히브리어 성서에 나타난 구세주인 예언자로서, 성서의 예언을 성취시킨 분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직접 자신의 전도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나(참조: 마태오 10:5-6 ; 15:24), 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가 실패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새로운 (아니면 참된?) 유대인 공동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마태 28:19). 이렇게 마태오란 이름으로 통칭되는 이 인물은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아마도 랍비의 교육을 받은 것같이 보여진다.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율사였을 것이다(13:51-52).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예수님께 순종하던 초기 교회시기의 사람으로, 예수님은 그들과 항상 함께 계시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28:20이하).

저술 장소

마태오라고 명명된 이 복음서의 저자는 희랍어를 쓰는 지역에 살았었고 유대인 출신으로 희랍어를 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하여 복음서를 썼을 것이다. 이 복음서는 아마도 팔레스티나에서 저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복음서의 기록이 시리아 지역이 아닐까 하는 심증을 갖고 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더 구체적으로 시리아 지역의 안티오키아를 지목하기도 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몇가지 증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복음서는 안티오키아에서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2세기경 안티오키아 주교였던 이냐시오가 증언하고 있다.

저술 시기

마태오 복음 22:7의 “임금은 진노하여 자기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라는 귀절이 흔히 알려진대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마태오 복음서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에 쓰여졌음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주후 100년까지로 잡는 것은 무리가 있는데 위에 언급했던 대로 이냐시오 주교(110-115)의 언급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태오 복음서는 대략 85년에서 9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복음서의 골격

많은 학자들은 이 복음서가 5개의 책으로 엮어졌다고 보는데 각 책은 마태오 특유의 강론이 들어있다. 즉 산상설교(5:1-7:29), 파견설교(10:1-42), 비유말씀(13:1-52), 공동체 설교(18:1-35), 그리고 종말설교(24:1-25:46)가 들어있다. 이 다섯가지 중심강론의 전반부에 서론 도입 부분이 있고(1:1-2:23), 마지막 부분에 결말 부분이 있다(26:1-28:20).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를 서술한 도입 부분과 결말부분인 수난과 부활 부분을 단순한 도입과 결말로 격하시키는 위의 골격에 동의하고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이 부분들이 5개의 책자로 골격을 갖춘 이 구분방법에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모세오경을 따라 5개의 책자로 마태오가 저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11장과 12장 또한 13장에 나오는 비유 말씀은 의심할 바 없이 이런 구분에 딱 들어 맞지만, 나머지는 이런 구분에 적합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시될 수도 있다. 8장과 9장의 기적사화는 산상설교와 파견설교에 연관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하간 이 복음서를 5개의 책자로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구분에 따라 이 복음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골격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개 요
서 론 (1:1 - 2:23)
Ⅰ. 예수에 관한 유대인들의 거부 (3:1 - 13:58)
전도 준비 (3:1-4:11)
말씀과 행적에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 (4:12-9:34)
제자 파견 (9:35-10:42)
선택 :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11:1-13:58)
Ⅱ. 전환부분 : 누룩에 관한 것 (14:1 - 16:12)
Ⅲ. 교회론적 부분 (16:13 - 20:16)
Ⅳ. 예루살렘입성과 예루살렘에서의 언행 (20:17 - 25:46)
Ⅴ. 수난과 부활 (26:1 - 28:20)

2. 마태오 복음서의 해설

마태오 복음서의 열쇠 : 28:16-20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주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올렸다. 그러나 몇몇은 의심을 품었다.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보시오. 나는 세상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날 마태오 복음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로 이 마지막 귀절이 마태오 복음서를 푸는 열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이 귀절은 마태오가 지녔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축약해 놓은 것이며, 둘째로 이 귀절은 이복음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생각과 사상들을 마지막으로 종합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를 이해하려면 이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태오의 그리스도론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란 말은 바로 마태오가 지녔던 그리스도론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다. 광야에서의 세번째 유혹에서 드러났듯이(4:8-10),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권세와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악마와 하게 되는데 이때의 권세와 영광은 오직 지상의 왕국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태오의 귀절은 지상에서의 권세와 영광 뿐아니라 하늘에 대한 것, 즉 모든 것에 대한 권능을 말하고 있다. 이 권능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으로 28장 18절에 나타난 이 어귀는 이미 11장 27절에 기록된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 주셨습니다” 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 이럼으로써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즉 구원계획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분이셨다(6:10). 물론 28:18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이 귀절을 쓴 것은 틀림없이 다니엘서 7:14에서 영향을 받아 쓴 것이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이 다니엘서의 ’그‘는 바로 앞의 귀절 13절에 표현된 대로 ’사람 모습을 한 이‘로서 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28:18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교회론

아버지로부터 받은 권능으로 사람의 아들은 열한명의 제자를 파견하여 모든 이들을 제자로 만들도록 하였다. 따라서 마태오에게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제자들의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평등성이 구현된 공동체로서 같은 제자라는 평등성위에 설립된 공동체이다. 18장의 공동체 설교를 보면 이 공동체는 형제애가 핵심이며 24:45-51을 보면 같은 동료 하인배(종)들을 돌보는 ‘종’이 되어야 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구약에 드러난 계약의 공동체처럼 그들 가운데에서나 하느님 앞에서나 평등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이렇게 교회를 파악하면서 마태오가 교회안의 권위를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마태오는 베드로의 역할과 열두사도들의 역할을 마르꼬보다도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야심에 의한 권위의 남용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교회내에서의 여러 다른 직분에 따른 권위의 행사는 교회 공동체구성원들의 기본적인 평등성보다는 부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권위나 구조는 이 기본적인 평등성이 훼손당하면서까지 강조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에 관한 많은 가르침이나 이론들이 복음서가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자들은 파견되어 모든 이들을 사람의 아들 공동체, 즉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데 이는 첫번째로 세례를 통하여 우선 이루어진다. 세례를 통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특정지파에 속하여 할례를 받는 것과 같은 제약을 깨뜨리는 새로운 절차를 도입한 것을 뜻한다. 이 구약의 제약은 심지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10:6, 15:24 또한 8:5-13)으로까지 확대시켜져서 깨뜨려진다.

두번째로 모든 이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은 세례와 함께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것으로 이루어진다.“내가 명한 모든 것”이란 표현은 산상설교(5:1-7:29)에서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이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며 이 가르침이 구약의 여러 법들과 상충될지라도 따라야 한다고 명확히 단언하신다. “...옛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5:21-22)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산상설교는 마태오가 기록한 5가지 예수님의 강론 중 첫번째 것으로 다른 4가지 강론도 모두 “내가 명한 모든 것을”이라는 데에 해당된다.

이쯤되면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왜 사랑의 계명과 같은 다른 핵심적인 주제들이 강조되지 않고 있나하는 의아심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마태오가 이런 서술방법을 채택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던 구약의 계약개념을 우선 교정시킬 필요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며 이 대핵심주제에서 다른 중요한 핵심주제들을 다루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계약개념은 어떤 것이었나?

계약에 대한 관점

위에서 다룬 마태오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구약의 계약이라는 관점에서도 합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나는 세상종말까지 어느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란 말씀을 1:23의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란 단어로 계약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 구약의 계약을 갱신하신 분이며 이 새로운 계약은 “세상종말까지”“우리와 함께 하시는”형태로 지속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관점은 18:20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둘이나 셋이 내이름으로 모여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마태오의 기록에는 마르꼬의 “예수님과 제자들이”란 표현을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구약의 계약개념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계약은 두 당사자를 상정한다. 즉 하느님과 계약의 백성이다. 구약에서는 이 두 당사자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한다. 즉 하느님은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하느님께 경배하고 복종하는 관계로 설정한다. 마태오 복음서의 28:16-20은 이와같은 관점을 명확히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 즉 왕권은 이제 구체적으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구현될 것이고(그리스도론), 둘째로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신약에 있어서는 사람의 아들의 백성, 즉 교회로 대치된다.(교회론)

마태오 복음서의 28:16-20에 나타난 결론들은 이와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기술된 수많은 귀절과 사상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열쇠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이 결론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에 연관되어 있는 가를 보기로한다.



예수님이 제자로 삼았던 이들은 갈릴래아 출신들이었다.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래아로 가시겠다고 하셨는데(26:32), 사실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땅’(4:15)이라고까지 불리웠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에는 ‘산’이란 장소가 자주 등장한다. 또 제자들을 데리고 흔히 산으로 가셨다. 마태오 복음서에서의 ‘산’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장소를 지칭하기보다는 예수님 또는 하느님이 특별한 일을 하시는 곳으로 해석된다. 이런 관점에서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산은 대단히 중요한 계기를 만드는 때와 사건의 장이다.

우선 유혹사화에서 우리는 산을 만난다(4:8-10). 같은 유혹사화라도 루가복음서에는 산이란 표현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루까4:5-7) 이 산은 마태오복음의 결론부분(28:16-20)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추후에 상술한다). 둘째로 산상설교에서도 산이 등장한다(5:1). 같은 설교를 기록한 루가복음서와는 대조를 이룬다(루가6:17). 이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된다. “내가 명한 모든 것을”이라는 복음서 결론말씀은 대단한 권위를 지닌 말씀이다(추후에 상술한다). 세째로 거룩한 변모에서도 산이 나타난다(17:1). ‘사람의 아들’이란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쓰여지는 것도 이곳이다(17:9). 수난의 때를 맞을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 거룩한 변모는 첫번째 수난 예고 직후에 일어난다(16:21).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은 복음서 결론 부분에 나타날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위와 영광에 대한 짧은 체험을 하게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17:5)라는 하늘에서의 소리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28:18)라고 스스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또한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늘에서의 소리는 바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란 결론부분의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마지막 결론의 말씀은 거룩한 변모를 완결시키는 것으로 부활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이 부활로써 구체화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기 전(14:22-33)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데(14:23) 이는 “세상 종말까지 ...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28-20)란 말씀과 연관이 있으며 또한 15:29에 기록된 산도 5:1에 나타난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메시아에 관한 언급과 연관이 있다.

자, 이렇게보면 산에서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복음서의 결론부분의 말씀과 깊은 연관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며 이러한 뜻에서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난 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혹 사화 (4:1-11)

부활하신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라고 단언하신 것은 유혹사화에서 “악마는 다시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그분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4:8-9)라는 기록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산에서 권능과 영광을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도 이 유혹사화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독자는 이 특별한 이야기에 관하여 의문이 있을 것이다. 복음사가는 이 사막에서의 유혹에 관한 사건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전도사업 마지막 단계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면 - 몇몇 성서학자의 주장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 서술의 주어는 일인칭으로 되었을 것이다. 즉 “나는 영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란 식으로 기술되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유혹이 악마와의 대면 상태에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유혹을 당한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여러 의문들은 잠시 덮어두고 유혹과 관련된 복음서의 다른 경우를 알아보자. 왜냐하면 복음서에는 유사한 유혹에 관한 기록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6장 1절에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시험을 받는데 이때 시험이란 단어는 유혹이란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예수께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달라고 청한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도 시험을 당하시는데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어떤 의미에서 유혹을 당하신다(16:23, 4:10 참조).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에 대하여 “내 뒤로 물러나라, 사탄아!”라고까지 질타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많은 군중으로부터도 유혹을 당하는데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본 이들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네 자신이나 구하려므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므나.”라고 말한다(27:40). 이 말은 첫번째 유혹에서 악마가 쓴 말과 같은 말투다. 이외에도 여러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혹당하신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유혹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볼 때 광야에서의 유혹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3:13-17). 이 세례기록에는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란 귀절이 나온다. 이 귀절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4:1)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2:7)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바로 종인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종합하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종인 메시아로써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유혹에 와서는, 이와같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선택은 도전을 받는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4:3-6)이란 말로 시작되는 두가지 유혹은 바로 이를 뜻한다. 즉 종인 메시아로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가겠다는 예수님의 선택은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유혹과 시험은 한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즉 광야에서의 40일간의 단식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때까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계속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이 유혹과 시험은 단지 악마로부터 온 것일 뿐만아니라,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제자들, 베드로 및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에 있던 군중들로부터도 온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혹과 시험을 당하시게 되는데,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듯이 “...그분은 죄 이외에는 모든 일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히브 4:15).”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쓴 저자는 이 말 속에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혹사화에 나타난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계속되었던 유혹을 종합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혹사화를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분에 삽입한 마태오의 의도는, 이 유혹자가 예수님을 유혹했던 강력한 힘으로 누구든지 유혹할 수 있다는 경고의 뜻을 담으려고 한 것이다. 특히 이 유혹을 예수님의 세례이후에 배열한 것은 세례받은 모든 이들에게 이와같은 유혹과 시험이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의 세례시에 하늘로부터 들린 “아들”이란 말과 유혹사화에서 나오는 “아들”이란 말은 바로 이 연관을 이야기한 것이며 또한 우리도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이 우리와 연관이 있다. 유혹사화에서 우리는 또한 예수님과 이스라엘 및 모세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데 “40”이라는 숫자가 이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님이 유혹에 대한 거부의 응답을 신명기에서 인용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신명기 8:3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낼 때 하느님께서 시련을 주시는데 이때 만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고 굶기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8:3). 예수님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첫번째 유혹을 물리치신다. 또한 두번째 유혹은 신명기의 6:16을 인용하여 물리치시는데 “마싸아에서 처럼 너희 하느님 야훼를 시험하지 못한다”(6:16). 세번째 유혹은 6장 13절을 인용하시는데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6:13).

광야에서의 단식후 예수님이 당하시는 세가지 유혹은 바로 예수님이 종인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세가지 유혹은 한마디로 “권능에 대한” 유혹이다. 종인 메시아의 신분을 예수님이 받아들이신 것은 이 권능을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쉽게 이루시지 않으리라는 결단의 표시이다. 예수님 주위에 있던 반대자들, 제자들 심지어는 친척들까지도 예수님이 이와같은 결단보다는 쉽게 메시아 노릇을 하실 것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더욱 효율적이고 빠르게 특히 좀더 고통을 덜 받는 방법으로 자신의 사명을 이루시기를 바랬던 것이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이루기 위하여 자기 선전을 하지 않으셨던가? 왜 예수님은 산헤드린이나 로마인과의 관계에서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를 취하시지 않으셨을까?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다면 예수님께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목표는 명확한 것이었는데 이 목표를 이루는 수단과 방법은 좀더 유연하고 타협적이었을 수는 없었던가? 예수님은 공생활 중 자신이 가진 권능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유혹을 주위에서 끊임없이 받으셨다.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이 권능을 사용하여 목표를 이룬다면 그에게 더 좋을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유혹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권능의 사용은 결국 권력게임에 빠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최초의 유혹시에 단 한마디로 단호하게 “아니다”란 응답을 하신 것이다. 이런 지름길을 거부할 때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종말이 죽음으로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셨다. 예수님은 더디고 오랜 어려운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이 길이 “자신을 낯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필립 2:8). 예수님은 이 거절로 악마들의 도움이나 악마들의 손을 잡고 쉽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을 택하시지 않으셨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시기 위하여 권력을 주고받는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시지 않으셨고 이와같은 자세를 단호히 거부하신 것이다. 즉 4:6에 나오듯이 악마는 자기자신이 이러한 권능을 받았으니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을 하는데 예수님은 이를 거부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권력과 영광을 갖지 않은 종의 신분으로 이루고자 하셨고 이에 따른 죽음을 감수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종의 신분으로 메시아가 되시어 죽음을 감수하신 이 분을 죽음으로부터 들어올리셨다(사도행전 2:32참조).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를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어 어느 이름보다도 빼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내리셨도다”(필립 2:9). 마태오복음서 28:18에는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나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신의 권능을 확인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악마가 제안한 유혹을 거절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처럼, 교회처럼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단지 예수님에 관한 기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마태오는 이것이 우리들에게까지 적용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은 당시의 공동체를 향하여 기록으로 남겼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28:16-20에 나타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으며 그 다음으로 세례와 유혹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세례로 새로와진 공동체의 백성이 당할 유혹에 관한 이야기도 상정되었다. 예컨대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귀절 중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니....”(3:16)라는 기록은 “백성이 요르단강에서 나와...”(여호수아 4:19)와 같은 내용이다(올라오다. 나와라는 단어는 anebe란 단어로 같은 단어이다). 이 귀절은 출애굽을 연상시킨다. 유혹사화에서 예수님이 40일동안 광야에서 지낸 것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와 유혹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기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을 한 백성, 즉 하느님의 백성, 교회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권력의 유혹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하셨다면 교회 또한 권력의 유혹에 대하여 같이 “아니다”라고 해야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공생활 중에 권력과 권능을 이용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으셨듯이, 교회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서 여러가지 이익과 특권과 특혜를 이용하여야 하겠다는 끊임없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유혹에 빠질 때마다 - 흔히는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자기변명을 늘어놓지만 - 보편교회뿐 아니라 지역교회는 예수님께서 “아니다”라고 거절하셨던 것을 “예”라고 받아들인 셈이 된다. 이런 경우 흔히 교회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큰 일을 이루었다고 사후 합리화를 해 대곤하지만 교회의 긴 역사를 보면 이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었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짧은 안목으로 교회가 이득을 얻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지 “외교적” 게임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님이 종이신 메시아, 섬기는 메시아이셨듯이 교회도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과격하다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아버지께 순명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아니다”라고 하셨을 일을 “예”라고 한다면 교회는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이다. 많은 경우 교회의 권위는 본질적인 것에는 거역하면서도 신자들에게는 강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교회는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타하셨듯이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마태오 16:23). 교회가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섬기는 교회, 종인 교회가 아니라, 외교적 잔재주나 권력놀음에 빠진 교회가 될 때 이미 교회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특정개인이나 단체에 손가락질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교회안에는 권력놀음에 허약하게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한두사람이나 몇몇 단체가 이러한 유혹에 빠져 전체교회가 마치 유혹에 빠진 것같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별히 교황청 기구에서 일하는 이들, 추기경, 주교, 본당신부, 수도회 장상, 평신도 단체의 장들은 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질때 전체교회가 함께 유혹에 빠진 것과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또한 누가 알겠는가? 교구청에 있는 이들이나, 수도회 장상의 비서와 같이 실질적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이와같은 유혹에 빠져 자신들을 위한 자체 “왕국”(하느님의 왕국이 아니라)을 건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믿음

이와같은 문제는 궁극적으로 신앙에 관한 문제이다. 교회를 신뢰하고 교회가 자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얄팍한 외교적 기술이나 세속의 힘을 믿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교회가 종이신 메시아처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갈 때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필립보 2:8)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교회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마태오 복음서의 핵심 결론부분에서 “몇몇은 의심을 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28:17). 즉 믿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의심했던 이들 - 믿음이 약한 사람들

그렇다면 의심하는 이들은 누구였으며 믿음이 없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이 귀절에서 제자들이 의심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었다(루가24:37, 요한 6:19참조). 이들은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만 보았으며 어떤 “영”으로 생각하고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계속하여 나무라셨던 “믿음이 약한 사람들아!”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6:30, 8:26, 16:8). 이 말씀은 제자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또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향한 나무램이기도 하였다(14:31). 특별히 14:31에는 “믿음이 약한 사람, 왜 의심을 하느냐?”라는 표현을 쓰고있는데 이때 쓴 의심이란 단어(distazein)는 신약성서에서 계속 쓰여지고 있는 단어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란 말은 제자들을 항상 나무라는 말로 쓰여졌다. 마태오는 이 복음서에서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하여 나무라고 있다. “믿음이 약한”이란 말은 마태오가 복음서를 저술할 때 믿음이 부족한 이들을 지칭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왔다. 이때 공동체는 위기에 처해있었고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믿음을 잃어가고 있었다(6:25-30참조). 사실 마태오 공동체는 믿음이 약한 공동체였으며 이때 이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마태오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이러한 위기에 빠지게 된데 대하여 마태오 자신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며 예수님이 베드로를 나무라시는 것처럼 자기자신을 나무라는 뜻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한 믿음

그렇다면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을까? 믿음이 약해지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믿음 약한 사람들”이란 귀절은 이 복음서에 네 번이나 나타나는데 그 중 두 번은 제자들이 배 위에 있을 때였다. 마태오는 배를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첫번째 경우를 보면 (8:23-27) 여기서 우리는 폭풍을 맞고있는 교회를 연상할 수 있다. 즉 현실적으로 태풍이나 요동, 또는 지진을 맞아 크게 어려움을 당하고 흔들리는 교회를 연상할 수 있다. 두번째 경우는 (14:22-33 특히 14:28-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를 것을 요구받고 있는데 베드로가 믿음이 약하여 따르기는 커녕 예수님의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경우이다.

바위 혹은 장애물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할 베드로가 믿음을 버리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복음서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믿음이 약한 사람”을 고찰하여 본다. 이 말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지방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있기 직전에 나온다(16:8).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첫번째 수난예고 앞에 나온다(16:21-23).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기록에는 복음서에 2번밖에 나타나지 않는 교회(ekklesia)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다.(두번째는 18:17). 이 베드로의 고백에서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대는 바위입니다. 나는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습니다”(16:18)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종인 메시아로서 자신이 받으실 수난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자 같은 베드로가 이 말씀을 거부했을때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신다. “내 뒤를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16:23). 이래서 베드로는 “바위”라고 불리고 또 동시에 “걸림돌”(skandalon)즉 “스캔달”로 불리운다.(“걸려넘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예수님의 공동체 설교에도 (18장) 계속 쓰여진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바위”로 불리운 것은 어떤 때인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고백했을 때이다. 이때에도 예수님의 방식대로 되시는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지 베드로가 원하는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우리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가 바라는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셨던 메시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 중심의, 우리 이익을 위한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다. 우리의 고백은 그렇다면 어떠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시다 라고 큰 소리로, 또는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교회가, 즉 우리모두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시다 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바로 종이신 메시아를 고백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우리, 즉 교회가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로 살면서 예수님을 ‘따라’사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의 고백은 삶으로 드러난다. 이 때에 ‘베드로’와 ‘교회’는 진정한 바위가 된다. 즉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갈 때 주춧돌의 역할을 하는 바위가 된다.

그러나 만약 ‘베드로’가, 교회가 종이신 메시아를 따라 살때 당할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세속의 권력과 이권, 특권을 추구하는 권력놀음에 빠지거나 교묘한 자기보신적인 외교적 놀음에 빠진다면, 이때 교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16:28). 권위나 제도나 구조자체가 최종 목표처럼 되어 이를 위하여는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위나 제도, 구조를 보존코자 할 때, 그럼으로써 인간을 희생으로 삼을때,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을 희생으로 삼아서까지 권위와 제도와 구조를 보존하려고 할 때 바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 교회에 성령의 보살피심을 약속했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항상 정당한가 라는 반문이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서 교회를 보살피시리라는 약속을 틀림없이 하셨다. 그러나 이 약속은 교회가 성령의 부추기심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약속이다.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갈 때 예수님의 약속은 교회자신의 약속 파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서야 성령께 순종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르티매오처럼 공식적인 제자들보다 먼저 성령께 순종한 수많은 이들이 나타났음도 알 수 있다. 루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임명하고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잇다(루가 10:1). 예수님의 제자는 단지 열두명만이 아니었다. 이때 파견된 70명의 제자들은 종이신 메시아를 따라 종이신 교회, 섬기는 교회를 대표했으며 제자들의 사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제자는 이미 제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교회의 권위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는 무엇인가? 이는 특별한 것으로 바로 예수님께서 열두제자에게 하신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제베대오의 아들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의 통치자는 엄하게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인자도 봉사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사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20:26-28).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종인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고 제자들, 특히 권위를 가진 이들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함을 천명하신다. 섬기는 교회의 권위는 보다 잘 섬기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렇게 잘 섬길 때 인정되는 권위이다.

무력한 교회

그렇다면 섬기는 교회는 아무런 입장에 서지 않고 단지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세상의 일을 거부만 하는 교회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종인 메시아셨으나 침묵만 하신 분은 아니셨다. 그분은 갈릴래아의 최고 지배자였고 권력을 한 손에 쥔 헤로데를 여우라고 공언했으며 (루까13:32), 대 제사장의 심문을 받을때 “왜 나에게 물어봅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오”(요한 18:21).라고 받아쳤으며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당신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요한 8:24) 또 “위로부터 당신에게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내게 대해서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19:11)라고 반문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이 받아들이건 아니 받아들이건 할 말을 하셨고 자신의 말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세상의 권력이나 종교의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립적인 입장에 섰던 분이셨다. 그분이 침묵을 지켰던 것은 외부의 압력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침묵을 지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은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섬기는 종인 교회는 종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침묵하기도 하고 아니하기도 해야한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사람들이 빠지는 권력 놀음에 발을 디뎌서는 아니되고 이 권력 놀음에 빠진 이들처럼 보여서도 아니되고, 행동해서는 아니된다. 교회가 가진 진정한 힘은 바로 예언자들이 지녔던 힘과 같은 힘이다. 예언자들은 실제로 아무런 힘도 없었고 힘있는 배경에 의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졌던 힘은 그 당시 왕들이 가졌던 힘을 능가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들이 지녔던 탁월한 도덕적 힘은 그들의 말이 오늘날에까지 들리게 하는 힘이다. 그들이 이토록 강한 힘을 지녔던 것은 왕들과의 힘 겨루기와 불의한 왕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말과 입장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지녀야 할 힘은 세상의 권력에서 오는 힘이 아니라 예언적이고도 도덕적인 힘이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힘을 지니려면 이와 같은 힘겨루기와 권력의 게임에 참여하기를 거절해야 한다. 교회가 때때로 강력하고도 예언적인 힘을 갖게되는 것은 권력이나 특권에 집착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을 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과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인간의 선익에 헌신하면서 침묵을 강요하는 모든 세력을 거부하고 당연히 할말을 해야 한다(사도행전 4:20, 31)

가르침...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모든 것을’

교회가 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모든 민족이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이다. 마태오에서는 산상설교(5:1-7:29)가 그 가르침의 핵심인데 이 산상설교는 5가지 설교말씀 중 첫번째 나오는 설교로, “내가 명한 모든 것”이란 말씀은 이 다섯가지 설교 말씀 전부를 가르친다. 이 다섯가지 설교말씀의 끝 부분에는 항상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라는 어귀를 삽입시켜 놓았다 (7:28 ; 11:1 ; 13:53 ; 14:1 ; 26:1)

이 다섯가지 설교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각기 다른 측면을 가르치고 있다 :

1. 산상 설교 ( 5 - 7장) : 하느님 나라의 헌장
2. 파견 선고 ( 10장) : 하느님 나라의 확장
3. 비유 말씀 ( 13장) :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특성
4. 공동체 설교 ( 18장) : 하느님 나라의 내적 모습
5. 종말 설교 (24 - 25장) : 하느님 나라의 완성

이제 이 각기 다른 설교말씀을 묵상해 본다.

1) 산상 설교 (5:1-7:29)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향하여 하신 첫번째 설교인데,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에 관한 감동적인 선언을 담고 있다. 산상설교는 모든 이들에게 대단히 어려운 요구를 담고 있기에 이를 해석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설교를 율법으로까지 해석하고 있는데 이렇게 어려운 요구를 모든 이들이 빠짐없이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산상설교의 형식이나 정신이나 그 역동성으로 보아 엄밀한 의미에서 법으로 보기는 어렵고 지향해야 할 방향, 나아가서 목표로 삼아야할 명령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산상설교의 내용은 규정이나 규약을 모아놓은 것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방향과 지향해야할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같은 급진적인 산상설교의 성격은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관련지어 볼 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4:17).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다”는 선포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인간 삶의 차원에서 볼 때는, 즉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드디어, 그리고 결정적인 모습으로 모든 인간에게 무제한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 연민, 용서로 다가오심이며 이로 인하여 인간들 또한 무제한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 용서로 같은 인간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엄청난 도전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산상설교는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급진적 요구를 하게되는 근거를 가진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네가지 행복 요건(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을 인간의 내면적이고 영성적인 것으로 기술하면서 이에 덧붙여 다른 네가지 행복 요건(온유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을 열거함으로써 마태오는 선포된 하느님 나라에 응답하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과 태도를 8가지로 간추려 놓았다. 이런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5:13-16). 이들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의로움에 넘쳐서(5:20) 이제는 더 이상 “옛사람들에게 말한”(5:21) 것만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즉 “내가 명한 모든 것”에 따라 살아야 함을 제시한다. 이러한 말씀 후에 제자들이 “의로움이 넘치는” 삶을 선행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여러가지 예로 설명한다. 즉 자선에 대한 가르침, 기도에 대한 가르침, 단식에 대한 가르침(6:1-18), 또한 재물에 대한 태도(6:19-34), 이웃과의 관계(7,1-12)에 대한 가르침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를 통하여 들은 말씀을 올바로 행할 것을 결론으로 내리고 있다(7:24-27).

2) 파견 설교 (10:1-42)

이 설교 부분의 결론 또한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귀절에 축약되어 있다. (28:16-20).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 “모든 민족을 내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은 “여러분은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들어가지 마시오, 오히려 이스라엘 가문의 잃은 양들에게로 가시오”(10:5-6)란 말씀의 한시성과 제한성을 깬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시면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가문의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습니다.’(15:24)라고 하셨지만 이 제한성을 때때로 넘어서신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한 일(8:5-13), 가나안 부인의 딸을 낫게 한 일(15:21-28) 등이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귀절에 축약된 이 말씀으로 10:5-6이나 15:24에 말씀하신 좁고 제한적인 관점을 과감히 털어버리는 놀라운 새 지평을 여신다. 즉 지금까지의 이런 좁고 제한적인 관점이 전 세상적 사명을 궁극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필요했던 한시적인 단계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에 이 파견설교를 삽입함으로써 복음사가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제자됨과 선교에 대한 관점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또한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는 산상설교는 예수님, 말씀에 권위를 가지신 메시아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잇따라 8장과 9장에 10가지의 기적사화를 주로 나열함으로써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행적에 있어서는 권능을 가지신 메시아로 묘사한다. 이 여러 장에 있어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함께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지난 후 복음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기록해 놓았다. 특히 10장은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임무를 부여하여 파견하시는데 이 때에 제자들은 산상설교를 가르치고 설교하도록 사명을 받는다. 뿐만아니라 8장과 9장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임무도 받는다. 마태오가 이해한 제자됨과 선교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셨던 구원의 활동을 말과 행위로 확장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비유 말씀 (13:1-52)

이 비유의 말씀 부분은 하늘 나라의 “신비”또는 “비밀”, 다른 말로 하면 하늘 나라의 성격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비유는 이 하늘 나라의 역동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이 비유에서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 겨자씨, 누룩, 보물, 그물등이 하느님 나라와 비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혹은 이들을 통한 활동과 일들의 총체가 하느님 나라와 비견되고 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13:24)에서 씨뿌리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와 비견되는 것이 아니라 씨뿌리는 행위, 그것도 좋은 씨를 뿌리는 행위를 하늘 나라와 비견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밀과 가라지(13:36-43), 그물(13:47-50)의 비유에서 마태오는 교회내에 있는 죄와 악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드러낸다 (22:1-14참조). 마태오가 그리고 있는 교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에 따른 “완전한 사회”로써의 교회가 아니다. 죄스러움은 그리스도인 각자 하나하나의 삶에 깃들여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구조 속에도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 역시 정화와 회개를 필요로 한다.

4) 공동체 설교 (18:1-35)

이미 앞에서 교회 내에 있는 권위에 관하여 거론한 바 있거니와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에 관한 설교의 발단은 제자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늘 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18:1). 명백한 것은 마태오가 이 부분을 복음서에 삽입하면서 의도했던 바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내의 권위나 명예로운 지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교회지도자들은 형제성을 하위에 두는 어떤 상위 개념이나 구조도 시도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23:9참조 “어느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태오가 염려했던 것은 교회 내에서 이와같은 훈계가 필요한 이들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사실이었다(18:2-4) “작은 이들”이란 말은 (18:6,10,14) 어린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이들,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는 착한 이들을 가리킨다(25:40 지극히 작은, 보잘 것 없는 이들과 같은 의미). 이렇게 보면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는 작은 어린이들에게 나쁜 표양을 보이는 어른들이 아니다. 많은 경우 강론에서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이 귀절이 인용되나 여기서 작은 이들이 어린이가 아니라면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들이 어른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18:1).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자는 “그 목에 나귀가 돌리는 연자맷돌을 달아맨 채 바다 깊숙히 빠지는 편이 오히려 그에게 이롭습니다”(18:6). 즉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는 교회 안에서 섬김의 자세보다는 야심에 차 열심해지는 이들이다. 야심을 가진 이들은 바로 걸림돌이 된다(16:23), 야심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형제성을 파괴시킨다(18:6-10). 그렇기에 교회의 지도자는 그 무엇보다도 사목적 책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어야 하고 항상 잃어버린 이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하며 특별히 작은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18:11-14).

교회는 형제성의 공동체이다(18:15, 21, 35에서는 계속 형제란 단어를 쓴다). 형제성의 공동체에서 화해를 위한 직분은 가장 고귀한 직분이다 (18:15-19). 이러한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약속과 보장을 받는다 (18:20 참조 28:20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이 공동체의 원칙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18:23-35)에 나타나듯이 끊임없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데 있다(18:21-22).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동료, 종(18:28, 31)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들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지도자들의 일이지 판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일은 아닌 것이다. 이 공동체 설교에서 마태오는 이러한 점들을 강조하려고 했다.

5) 종말 설교(24:1-25-46)

이 설교는 종말론에 관한 본론(24:4-31)과 다가올 종말세상에 대한 일곱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24:32-25:46)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지막 네개의 비유로, 특별히 충실한 종의 비유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24:45:51).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습니까?” 이 질문은 명백히 오늘날 교회의 사목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는 질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와서 보실 때 부지런히 자신의 사목적인 일을 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는 복되도다“ 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48, 49절은 못된 종에 관한 내용인데 동료 종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술을 먹는 사실을 묘사하면서 이런 때 주인이 온다면 “위선자들이 받을 몫을 줄 것”이다(25:51).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25:1-13)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공동체는 때의 변함(여기서는 종말의 연기)에 적응해야 함을 말하고 있으며, 달란트의 비유(25:14-3)는 사람이 받은 만큼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사실 오늘날 교회가 저지르는 죄 중에서 큰 죄는 재능의 낭비라고 말할 수 있다. 양들과 염소에 관한 비유는 (25:31-46) 최후의 심판 기준, 즉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있으며 이 계명은 지극히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 기준임을 선언하고 있다.

결 론

자, 이제 마태오 복음의 요점을 정리해본다.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에 대한 관점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쓰여졌는데, 이 교회는 종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종이 되어 섬기는 교회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세속의 권력과 권능을 거절하셨듯이 교회도 이러한 권력놀음에 빠져들어서는 아니된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도록 파견되는 제자들의 형제성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형제성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제자들이 평등한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이 된다. 교회 안에 직위나 권리에 따른 구별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교회라는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이들”을 우선한 전체 하느님 백성에게 더욱 효과적인 섬김을 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이 교회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사목적 관심과 화해의 사도직으로 이는 행정적 기술이나 교회법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이 교회 공동체가 제대로 살아가는 공동체인가를 판별하는 궁극적 기준은 사랑의 계명으로, 이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셨던 “작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다 (25:40, 45).


[중요 요점]

☞ 마태오 복음서는 대략 주후 85년부터 90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이다.
☞ 마태오 복음은 5개의 책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산상설교(5:1-7:29), 파견설교(10:1-42), 비유말씀(13:1-52), 공동체설교(18:1-35), 그리고 종말설교(24:1-25:46)이다.
☞ 마태오 복음서의 열쇠는 28:16-20에 있다. 이 귀절은 마태오가 지녔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축약해 놓은 것이며, 마태도 복음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생각과 사상들을 마지막으로 종합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 마태오의 그리스도론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이라는 내용이다.
☞ 마태오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제자들의 공동체로써 평등성이 구현되는데 즉 같은 제자라는 평등성이다.
이 공동체는 형제애가 핵심이며 같은 동료 하인배(종)들을 돌보는 ‘종’이 되어야 하는 공동체이다. 또한 이 공동체는 야심에 의한 권위의 남용을 끊임없이 주의해야 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내의 어떤 권위나 구조는 이 기본적인 평등성이 훼손당하면서까지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 모든 이들을 사람의 아들 공동체, 즉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은 세례를 통하여, 또한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받으신 사막에서의 세가지 유혹은 한마디로 ”권능에 대한“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권력과 영광을 갖지 않은 종의 신분으로 이루고자 하셨고 이에 따른 죽음을 감수하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종의 신분으로 메시아가 되시어 죽음을 감수하신 이분을 죽음으로부터 올리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주셨다.
☞ 예수님이 종이신 메시아, 섬기는 메시아이셨듯이 교회도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아버지께 순명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 교회는 교회를 자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교회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참교회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종이신 메시아를 고백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우리, 즉 교회가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로 살면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의 고백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 때에 베드로와 교회는 말 그대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주춧돌 역할을 하는 진정한 바위가 된다.
☞ 그러나 만약 ‘베드로’가, 교회가 종이신 메시아를 따라 살 때 당할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때 교회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 예수께서 약속하신 교회에 대한 성령의 보살핌은, 교회가 성령의 부추기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약속이다.
☞ 섬기는 종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라 침묵하기도 하고 선언할 수도 있다.
☞ 또한 교회는 세상사람들의 권력놀음에 발을 디뎌서는 안되며, 권력에 의지하여 행동해서도 안된다. 교회가 지녀야 할 유일한 힘은 예언적이고도 도덕적인 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과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며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 교회는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신자들이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는 이 복음서에서 가르침의 핵심이다.
☞ 산상설교는 예수께서 군중을 향하여 하신 첫번째 설교로써,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에 관한 감동적 선언이다. 내용은 신자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와 방향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사람들이 무제한적, 무조건적 사랑과 연민, 용서로 같은 인간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엄청난 도전이다.
☞ 파견설교(10장)는 마태오의 제자됨과 선교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셨던 구원의 활동을 말과 행위로 확장하도록 전 세상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비유말씀(13장)은 하늘나라의 역동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마태오가 그리고 있는 교회는 “완전한 사회”로써의 교회가 아니라, 정화와 회개를 필요로 하는 교회이다.
☞ 공동체설교(18장)에서 마태오는 교회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교회내의 권위나 지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교회는 형제성의 공동체이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동료, 종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 즉 자신들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지도자들의 일이지, 판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일은 아니다.
☞ 종말설교(24-25)는 다가올 종말세상에 대한 일곱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와서 보실 때 부지런히 자신의 사목적인 일을 하고 있는 교회지도자는 복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저지르는 죄중에서 가장 큰 죄는 재능의 낭비이다. 또한 최후의 심판은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계명은
지극히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 기준임을 선언하고 있다.
☞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에 대한 관점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쓰여졌는데, 이 교회는 종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종으로서의 교회가 되고 세속의 권력놀음에 빠져들지 않으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도록 파견되는 제자들의 형제성이 그 핵심을 이룬다. 교회안의 직위와 권리에 따른 구별이 있다면 이는 교회라는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이들”을 우선한 전체 하느님 백성에게 더욱 효과적인 섬김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공동체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랑의 계명이며 특히 예수께서 자신과 동일시 하셨던 “작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다.

[출처/참사람되어 단행본,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 헤르만 헨드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