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12주일 6월21일
창세 21:8-21, 시편 86:1-10, 16-17, 로마6:1-11, 마태 10:24-39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삽시다>
- 하느님의 사랑 -
하느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 하나까지도 낱낱이 다 세시는 분이십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집으려고 하면 너무 가늘어서 집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장 작고 미세한 머리카락조차 다 세어두실 정도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생각, 기질, 형편과 처지를 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히브리어로 헤쎄드, ‘한결같은 사랑’ 어찌되던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를 짝사랑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는 기쁨과 축복-
여러분,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하는 동안에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에베소서 1장17절에서 사도 바우로는 에페소 교회에 하느님을 아는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개역성경-계시의 영)을 내려 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기를 기도한다고, 에베소교회에 말합니다.
여러분,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알아가시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면서 목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예수님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파송을 앞둔 제자들을 보시면서 굉장히 기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가는 데마다 환영받기 보다는 그 반대의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충분히 아셨기 때문에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리떼 가운데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면 그 양은 온전히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이리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복음 전파를 하시면서 가시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배척받고 비난받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보면서,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까지 들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대접을 받으셨으니 제자들도 스승이 받은 그런 대접을 받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일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길은 수고와 어려움의 길이다-
여러분,
우리는 어제 주말인 토요일에 하루종일 교회에서 누가 오실지 모르는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물품을 준비하고 진열해놓고 손소독제, 간식과 환영편지를 준비하고, 팀별로 역할을 분담해서, 아침 일찍부터 뙤약볕 아래에서 다섯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신 분은 전부 합해서 30명 넘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행사를 처음해보면서 우리 공동체는 귀하고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여러 날 동안 아침 저녁으로 사랑나눔장터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 모든 시간과 정성과 노력에 비해서 결과가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지역 사람들을 섬기고자하는 우리의 기도와 사랑과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셨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수고를 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어떻게든 알리고 전하는 것에 대해서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모으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길은 처음부터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혹독하고 비참했는지 쿼바디스, 벤허 이런 영화에서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 보신 분이 계시면 꼭 보시길 권합니다.
- 복음 전파는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
교회의 역사가 이천년이 되었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교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여전히 니케아신경, 사도신경의 고백이 우리에게 믿음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성찬례 중에 제대에서 ‘신앙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하면 우리는 다같이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고백합니다.
이천년전 초대교회 박해시대에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네로황제가 64년에 로마시에 방화를 했는데 3/1정도가 불에 탔습니다.
민심이 흉흉해지니까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신자들이 방화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그때부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신자들에게 가혹하게 했던지 예배를 드리려고 모이면 박해로 인해서 신자들 가운데 다리를 절거나, 팔이 불구이거나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250년간 박해시대가 그쳤습니다. 12년 지나 325년 니케아회의가 열렸을 때, 참석한 주교가운데에도 박해를 겪고 장애가 된 이들이 여럿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 성찬례 마지막 파송에서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선포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화답합니다.
초대교회 때에 이 파송 선언은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거기에 화답하는 것은 내 목숨을 걸고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고 고백이었습니다. 할까 말까 갈등하다가 그럼에도 해야지,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입술을 깨물면서 다짐하고 선포했을 겁니다.
-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칼과 같은 예리함이다 -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을 세 번에 걸쳐서 하십니다.
복음 전파하는 것을 대적하고 배척하는 권력있는 사람들
기독교 신자인 것을 적대하는 가족들, 어디에서나 극심한 반대와 저항의 무리를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사야서 41장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만남, 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하실 때 맨처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하느님께서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나를 너무나 잘 아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불러서 내 자녀삼았으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부터 너를 내가 너의 아빠가 되어서 너를 지키고 너의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사에서 순교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가 초대교회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20세기 21세기에 이르러서 가장 많다고 합니다.
종교간의 갈등과 내전, 전쟁 등 강경이슬람세력이 기독교 한 부족을 몰살하고 학살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1953년이후 기독교 신자 약 3만명 정도가 순교한 걸로 전해집니다.
복음이 맨처음 전파되는 나라든지 부족이든지 처음 그 땅을 밟고 전파하는 사람은 온전히 살아남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복음은 듣는 이에게 호감을 주기보다는 적대감을 갖게 하는데 그것은
사도 바우로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이치가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들리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적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많은 분들이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갖는 것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제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 제사지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다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네 번의 박해를 겪었는데
그 시초가 제사였다고 합니다. 전주에서 두 사람이 신자가 되고서 제사드리는 신주를 찢어 불에 태웠는데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사교라고 괴이한 가르침이라고 해서 그 두 사람은 참수를 해서 시신을 거리에 내걸었습니다. 그것이 1791년입니다. 순교했던 그 자리에 천주교 성당이 세워졌는데 전주 전동성당입니다. 그 성당에 순교자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유교를 숭배하고 그것을 나라의 정신이고 기둥으로 삼던 조선시대에 제사를 거부하는 행위와 그런 가르침은 대단히 불경스럽고 있을 수 없는 역적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 예수님을 자랑하는 용기있는 사람 -
지금 우리는 예수님 믿는다고 박해를 받는다든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이 평화스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을 다니는데 그 직장이 기독교하고 좀 다른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점심식사시간이 되면 기도는 해야되겠는데 사무실에서 하자니 사람들이, 직장동료들이 신경쓰이고 해서 생각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혼자 식사기도를 하고 와서 밥을 먹곤 했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화장실에 가서 식사기도하는 분이 안계실줄 압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를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신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도 바우로가 말씀한 대로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을 때, 이 세상의 이치로는 어리석게 들리기 때문에 그 말을 전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삽시다 -
사랑하는 요한교회 교우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어려움이나 고난을 받아도 기꺼이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우리는 주님을 통해 영광만 구하고 고난은 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상속자는 아버지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고난을 통과하고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시선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시면서 난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여전히 붙잡고 있는 마지노선이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온전히 이전의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마지막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여러분,
하느님을 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기쁨과 함께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세시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도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증인된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시는 성요한 교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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