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영광

유테레사 2021. 5. 9. 22:23

59, 부활후6주일

사도 10:44-48, 시편 98, 1요한 5:1-6, 요한 15:9-17

 

<썩지 않을 열매맺는 성숙한 공동체>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부부의 날 등 해당되시는 분들게 건강하시고 가정 안에 평안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

친구로부터 주고받는 영향력이 이렇게 크다는 표현입니다.

가깝다 보니 친구로 인해 안 좋은 일도 관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한강에서 죽은 대학생이 같이 간 친구와 연관되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속히 진상이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1. 친구를 위해 죽기까지 서로 사랑하라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부른다고 하십니다.

친구의 기준은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계명입니다.

희랍어로 사랑이란 여러 표현 가운데 필리아가 친구간의 사랑, 우정을 나타냅니다.

친구 필로스는 친절이나 긍휼의 행동을 나타내다라는 뜻의 동사 필레오 로부터 나왔습니다.

필리아, 필레오, 필로스, 친구와 연관된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를 사랑하는 사랑의 범위가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뜻합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이 대목에서 저는 씨름을 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붙잡고 한참 정지된 상태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의 모습은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잘 해주고, 내가 하고 싶을 때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어줍니다.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 말이나 행동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거리를 두고 같이 있어도 찬바람이 쌩~ 붑니다.

그런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라는 이 말씀 앞에서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저를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잘 아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 우리는 그 모습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갑자기 업그레이드하라고 하는 것 같은 이 계명,

그 안에 담겨있는 과정같은 것들을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2. 친구로 부르신 예수님

친구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 구성원입니다.

성 바우로가 말한 기독교 개념 가운데 지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식성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고,

나와 다른 사람이 내 곁에 있고, 밥을 같이 먹고, 일을 같이 하고,

살아온 습관이나 버릇이 다른 사람하고, 함께 늘 만나고 얘기를 하는 생활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은 상대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 지체가 이해가 안되고,

이해가 안되면 끊임없이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는 계속 대화를 하고,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과 공동체 질서 안에서 오픈하는 건강한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원 생활을 보면 하루 일과 가운데 광고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위임된 책임자들이 그날 의회에서 결정한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듯이 광고하면서 모든 구성원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처음 접하게 되면 저렇게 자세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로 알립니다.

지체들 간에는 다른 지체와 개인 시간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에 친구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3. 종에서 벗으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요한복음 1515절의 앞부분입니다.

종 또는 노예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 할 수 없습니다.

의사결정권이 없고 지시하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이 시대는 노예제시대입니다.

부산교구 주교님 세례명인 오네시모란 사람은 당시에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인 필레몬에게서 도망쳤다가 바우로를 만나면서 기독교인이 되고 감옥에 갇힌 바우로를 시중들기도 했습니다.

바우로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심장을 떼어보내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제이상으로 받아줄 것을 편지로 요청하는 것이 필레몬서입니다.

노예를 형제보다 더한 신분으로 대해준다는 것은 그 시대에 있을 수 없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것이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종과 친구의 특징을 말한다면 비인격적인 삶과 인격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종은 인격을 존중받지 못하고 인격이 말살된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과거에 비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서 아픔으로 기억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학교다닐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도 교육적 측면에서 전인격적 교육이라고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원에 들어가서 인격적인 것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볼 수 있었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인격적인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건 그를 몰아 부치지않고, 밀어 부치지 않고 기다려주면서, 일이건, 무엇이건 그 결과에 대해 그대로 수용해 주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와 분위기, 생활은 마음을 열고 변화를 가져옵니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따뜻하고 온유함, 무례함이 정말 적었던 생활이었는데

그 바탕에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고, 성령의 내적, 외적 활동이 있었고

활발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친구를 거론하신 경우가 여러 번 있습니다.

마태2650절에 친구여, 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친구는 헬라어로 헤타이로 라고 합니다.

필로스는 개인적 친분을 의미하는 친구이고

헤타이로는 직업적인 동료관계를 뜻하는 친구라고 합니다.

헤타이로(친구여), 라고 부르는 의미는 적의나 반감이 없고 정중한 예의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친구여~’ 하셨느냐면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받아 먹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나가서

유대 대제사장과 로마병정 등 일단의 무리들, 혹자는 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함께 왔다고 하는데, 이들을 끌고 온 유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다 세우고 온

유다를 향해서 친구여, friend~ 친구라고 하십니다.

공동번역에만 이 사람아,’ 다른 성경에는 전부 친구로 되어 있습니다.

친구여~ 네가 하려는 일을 하여라.’

유다를 향해서

이 배신자야, 이 도둑아, 그렇게 할 수 있을 상황에서도

끝까지 정중하게 예의를 다해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친구의 의미를 또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전부 알려줬으니 이제부터 너희는 종이 아니고 친구로 부른다.

종의 신분에서 예수님의 친구로 격상되어졌지만 실제 현실적으로는 이 큰 차이, 뭔가 속이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서를 통해서 그 내용을 담아보겠습니다.

 

4.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영광

베드로후서 14절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 새번역에는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 우리말성경에는 신의 성품에 참여, 가톨릭성경에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 공동번역에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는다.

우리가 묵상할 구절이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동기를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의미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예수님의 친구,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연합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성령의 코이노니아로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567절에 계속 이어집니다.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전부 성령의 열매와 같은 것 들입니다.

- 믿음은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덕은 도덕적 탁월성입니다.

지식은 통찰력으로 점진적으로 향상되는 것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인내는 소망가운데 지속적으로 참아내는 것,

경건은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교우끼리의 사랑은 형제, 자매인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입니다.

만민에 대한 사랑

이 여덟 가지 덕목이 성령의 내적 활동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덕목들을 내 안에 쌓아가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5.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면서 사랑 할 수 없는 존재인줄 아시면서도 그 렇게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 주신 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으로 먼저 본을 보이셨기에

우리는 이제 결단하고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시면

성령의 코이노니아로 점진적으로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능력이 없는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변에 이웃하고 있는 모든 이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자라기에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목적과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책임의 관계라고 말씀하시면서

조직폭력배들이 조직원 가운데 누가 감옥에 가면 같은 조직원끼리, 그 가족을 돌보고, 자녀를 돌봐주는 책임지는 관계를 빗대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깡패요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요한교회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직, 예수님의 깡패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요한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놀라우신 이 특권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따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썩지 않을 열매를 맺으시면 기도하는 것을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평생 순종하고 지켜가기로 결정합시다.

그래서 썩지 않을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셔서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사랑의 성요한 교회 공동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