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님의 사명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유테레사 2022. 1. 23. 20:24

123일 연중3주일

느헤미야 8:1-10, 19, 4:14-21

<예수님의 사명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찬례 순서에 있는 본기도는 그날 예배 의향을 명확히 드러내는 주제 기도문이라고 기도서에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권능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이 은총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예배 의향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그날의 복음입니다.

 

1. 나자렛 회당에서 사명 선포

루가복음 4장 전반부는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공생애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 후 갈릴래아로 돌아가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이 4장의 후반부입니다. 예수님은 광야로 가실 때도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셨고,

갈릴래아로 가실 때도 성령이 충만하셔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가셨습니다.

갈릴래아 나자렛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자란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자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과 이곳 나자렛 사람들은 서로 잘 아는 한 동네사람들입니다.

이렇듯 나자렛은 예수님께 아주 특별한 지역입니다.

4장 후반부인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어릴 때부터 자란 나자렛, 이곳에서 나름의 의식과 같은 시간을 갖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하면 구세주로서 일종의 취임식처럼 이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서 두루마리성경을 건네받습니다.

건네받은 성경을 펼쳐서 이사야 611-2절을 읽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서에는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것은 이사야서입니다.

같은 뜻이지만 표현이 약간 다릅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사야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기원전 800년대입니다.

이때는 앗시리아제국에 눈치를 보면서 압박을 받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남 북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입니다.

이사야는 남유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당시 이사야의 원래 메시지는 강대국의 압박에서 해방되는 약속, 포로에서 해방되어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귀환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사야서 구절을 그대로 낭독한 루가복음 4:18-19

이사야가 활동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는 소망이었다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낭독할 때는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그리스도십니다.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의 모든 사명을 함께 하는 기름부음받으신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낭독하신 루가복음 418-19절은 예수님의 사명선언문(Mission Statement)’, 또는 메시아의 자기 선언’ ‘취임설교등 으로 일컬어집니다.

이 두 구절 안에 구세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 이 땅에서 하실 일들을 선언, 또는 사역 계획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이제부터 이 일을 내가 하겠습니다.

이것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정의를 이루어라

이 내용가운데 보면 네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 묶인 사람들, 눈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물질의 빈곤에 처한 사람들인데, 왜 가난하냐면 힘이 없어 강한 사람들에게 빼앗겼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가진 자가 나눠주지 않아서 가난한 것입니다.

묶인 사람들은 힘이 없어 강한 사람들에 의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눈먼 사람들은 강압에 의해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입니다.

억눌린 사람들, 역시 힘에 의해서 권리를 빼앗겨버리고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처한 정상이 아닌 비정상의 상황을 각각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선언의 전제는 성령으로, 성령과 함께 하는 것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받고서 특별히 돌봐야할 네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대상입니다.

가난한 사람 하면 게으르다. 일하기 싫어한다. 성실하지 않다. 책임감이 없다.

이렇게 가난해지는 이유를 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느님께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아픈 손가락,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가는 자식입니다.

가난이란 기본 조건에다 묶이고, 눈 멀고, 억눌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살아가는 생활이 어떤 삶일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거제하고 포로는 연관이 깊지요. 6.25 당시 거제는 전쟁 포로를 수용했던 곳입니다.

포로 수용소 안에서 별별 일들이 일어났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전날까지 있었던 사람이 다음 날 안보인다면 그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고 죽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고, 아무것도 보장이 되지 않는 삶이자 환경입니다.

다른 면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은 이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

포로에서 해방되어서 인간의 권리를 누리고 보장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정의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정의는 바르게 원래대로 회복케 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현실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육신적인 것 삶의 전반적인 모든 것이

다 함께 온전히 치유되고 회복되고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나았다 하시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시자 그는 중풍병이란 묶임에서 풀려납니다. 자유케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갑니다.

완전한 자유를 얻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로부터 해방받는 자유도 정의에 포함됩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의 때가 언제부터 될 것인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신 그 날부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계속 진행되었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선언이 선포되던 나자렛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뤄졌다고 하니까 뭐가 이뤄졌다는 것인지

어리둥절 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후에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낭떠러지로 밀어뜨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어린 시절 모습, 목수로 일하던 예수,

아버지가 요셉이고 심부름하던 예수, 이런 자신들과 함께 했던 그 기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까이에서 은혜와는 멀어져있었던 것입니다.

 

3. 은총의 해, 희년 선포

예수님의 선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은총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합니다.

레위기 25장에 언급하는 희년(禧年)- 히브리어 요벨(Jobel), 영어 쥬빌리(Jubilee)-

십계명 중에서 네 번째 계명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처럼 일곱째 한 주간 중 하루,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6년이 지난 7년째마다 안식년을 지키고, 안식년을 일곱 번째 지키는 49년째 다음 해인 50년째가 희년입니다.

레위기 2510절에 희년에는 땅을 소작하는 자도 원래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고, 노예도 해방되어 자기 가족에게 돌아감으로 모든 사회가 원상복구되어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도록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희년에 대해서 들어봤습니까? 질문하니까 대부분 교인들이 못들어봤다고 대답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언제 이렇게 합니까? 희년에 이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욕심과 탐욕이 고삐풀린 망아지 같아서 끝없이 가기만하는 것을 아시고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 그래서 희년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탐심과 탐욕에 대한 사회적인 특단의 조치입니다.

 

1독서 구약 느헤미야서에 에스라가 성경을 읽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화답합니다. 성경을 듣는 이스라엘백성이 여러 가지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라학자가 성경을 읽으러 단상에 오르니까 모두 일어섭니다.

우리가 복음 읽을 때 전부 일어서는 것과 같지요.

성경을 읽고 풀이해주는데 들으면서 웁니다.

아 우리가 잘못 살았구나,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우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산 죄를 어떻게 합니까?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몇 시간동안 이런 시간을 갖습니다.

이 날이 칠월 초하루입니다. 이 날은 나팔절이라고 합니다.

나팔은 숫양의 뿔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매년 칠월 초하루에는 나팔을 불면 전부 모여서 성회를 합니다.

그리고 열흘째는 욤키푸르-대속죄일이이라고 합니다. 회개하는 절기입니다.

개인에서부터 나라의 죄까지 하느님께 회개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칠월 보름이 초막절입니다.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거의 같은 기간입니다.

 

초막절에는 나무와 이파리로 텐트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일주일간 지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지낼 때 양식을 주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매년 이런 절기를 하면서 칠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을 맞이합니다.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고 쉽니다. 사람도 쉬지만 땅도 쉽니다.

그러면 뭘 먹고 사느냐, 그럴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 육년 째 되는 해에 다음해 양식까지 거두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칠년 째에는 안식년을 지냅니다.

그렇게 일곱 번을 지나고 49년째 안식년을 지내면 그 다음 해인 50년째가 희년입니다.

일곱째달 보름, 이 초막절에 희년을 선포합니다.

희년에도 경작하지 않습니다. 안식년하고 희년, 합해서 2년간 땅을 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쉬는 이유가 놀러가거나 딴일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교제하며 영혼이 쉼을 얻고 회복하라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주일 지킨 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일하시다가 7일째 쉬신 것처럼 우리도 6일간 일하다가 7일째 하느님을 예배하며 우리 영혼이 쉼을 얻고 하느님의 말씀도 듣고 하느님과 친밀해지는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럼 일 안하면 수입에 차이가 생기지 않냐 할텐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이 믿음이고 순종이고 충성입니다. 또한 말라기에서 그렇게 되는지 실험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4.  성령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레위기 25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시고 말씀하시길

오늘 들은 이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가 왕이십니까? 누가 다스리십니까?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지배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믿으면

예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 주권 안에 들어갑니다.

오늘 교회 처음 나왔는데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면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사신다고 믿으시는 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시고

이제부터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따르겠다고 하시는 분은 마음으로

주님께 삶을 맡겨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잠깐 사는 나그네입니다.

모든 인간은 땅의 원 소유주인 하느님께 임대해서 살고 있는 세입자같은 형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세주의 공생애 활동의 출발점에서 주님의 은총의 해, 희년을 선언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년을 선포하니까 나자렛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큰 일났다. 저 사람이 희년을 말한다. 살려두면 안되겠다했다는 것입니다.

출발부터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은 것입니다.

 

희년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땅 문제입니다.

땅은 내 것이다. 너희는 이 땅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이다. 땅을 사고 팔지 말라. 레위기 2523

하느님께서 만드신 땅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땅이 자본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은 한계가 있는 자원입니다.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와 신자가 그 정신을 그대로 지켜나가고 실천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모두가 기쁘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옳은 일, 정의를 이루는 일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는 이뤄집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희년이 이뤄지는 것을 초대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사적인 권한으로 하지 않는 교회공동체와 국가들이 있었던 것을 보게됩니다.

 

어렵게 들리셨을 예수님의 사명선언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고 복음을 알아듣고 믿는 사람은

억압과 눌림에서 해방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자유와 해방과 치유의 선포입니다.

성령이 오시고 성령과 함께 하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즉시 이루어져가는

예수님의 사역 계획 가운데 오늘 날 현재 우리 교회 공동체와 우리의 삶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젼이 성령과 함께 우리 공동체와 우리 한 분 한 분의 삶에

비젼이 되고 소망이 되시어 다 함께 이루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