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사람

유테레사 2022. 2. 13. 15:12

213일 연중6(다해)

예레 17:5-10, 시편 1, 1고린 15:12-20, 루가 6:17-26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사람 >

 

분도신부님이 확진되고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그 외에는 모두 음성이어서 감사합니다.

김신부님과 신한옥선생님이 속히 회복되시고 다음 주에는 함께 예배드릴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긍지를 갖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크리스챤으로 긍지를 갖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누가복음 6장은 마태복음 5장에 산상수훈과 비슷합니다.

마태복음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은 평지에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마태복음과 오늘 본문은 비슷하면서 다른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은 복을 말씀하는 데 반해서

누가복음은 복과 화를 함께 언급합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 무리가 모여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특별히 택하신 열두제자를 포함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 다음 그룹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목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점이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면 마음이라는 말이 뜻하는 의미가 굉장히 다양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지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있어도 그럴 수 있고, 물질이 없어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정결한 사람이다. 순수한 사람이다.

이렇게 이해도 하지만 뭔가 많이 다듬고 도출해야하는 표현입니다.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다듬고 거르고 할 필요가 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새해에 복 받기를 빌어주는 덕담은 가난, 빈곤이 아니라 풍요하기를 바라면서 복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복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가난한 사람, 가난이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첫째로 꼽으시는 것입니다.

가난, 그러면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보리고개, 초근목피, 가까이는 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 방 한칸에 일곱 여덟 온 가족이 다함께 살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과거의 회상으로 족하다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행복합니까?

행복한 이유가 어디에 있고, 무엇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 자리에 이루어졌다.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바실레이아, 하느님의 왕국.

이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도 없고 물질도 없습니다.

그리고 권력도 없고 힘도 없고 가진 것이 없습니다.

즉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오고 몰려오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에게는 부정적이셨다고 봅니다.

어느날 부자청년이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 했을 때

네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서 나를 따르라, 부자청년이 그 말씀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이르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온전히 하느님 한 분이고 그래야 된다는 것이지요.

돈과 하느님을 두고 라이벌 관계로 만드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에 대해서 좋은 비유나 좋은 표현은 거의 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경우에 그는 넉넉한 형편이였고

강도 만나서 초죽음된 사람을 자신이 가진 것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부자에 대한 유일한 긍정적인 비유입니다.

부자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남을 돌보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면서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본문 후반에 화를 입는 사람이 그런 사람에 속합니다.

 

2. 하느님 안에서 만족함을

그런데 물질이 없어서 자유롭고, 물질이 있어도 자유롭다면

궁핍함이나, 풍요함이나 각 각 처할 줄 아는 비결에 대해서 성 바울로는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으로 인해서, 하느님 안에서 만족함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는 기쁨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읽다가 내 마음을 터치하는 구절이나 단어를 묵상하면서

깨달아지는 말씀이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채워져 올라오는 기쁨

내 영혼을 소생케하는 그 만족함,

이 충분한 만족을 세상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음성을 듣는다면

마음 깊은 곳에 차지하는 안정감은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가장 큰 만족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회개할 때, 회개하고서 바뀐 세상을 보면서 하느님의 위엄 앞에서

벅차오르는 감격과 안정감으로 얼마나 만족했던지 모릅니다.

하느님 주시는 이 만족함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보다, 이 물질보다 이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하고 축복합니다.

 

34년간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사역하시던 독신 여선교사님이 지난 22일에 소천하셨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우간다의 나이팅게일로 불렸는데 34년간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우간다 성공회 네비교구가 세워질 때 개척멤버로 의료선교와 교육에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디아민이 통치할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어떻했느냐,

그냥 굶었지요.” 그러세요.

바쁘게 활동하시던 중에 비포장도로 운전하고 다니다 척추다치시고, 휠체어가 넘어지면서 골반뼈가 부러지고, 19년에 한국에 나오셔서 재활치료받고 요양원에 지내시다 소천하셨습니다.

제가 18년도에 그곳에 가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서 마지막 질문에 그동안 말라리아에 몇 번 걸리셨냐, 하니까 첫해에는 한 달에 한번, 그 다음부터는 두세달에 한번, 40번은 걸렸을 걸,”

힘들고 고생스럽고 가난한 삶 가운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느님 주시는 만족함, 그 기쁨이 있기에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를 소유합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3. 하느님을 갈망함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는 성직자, 사역자, 선교사만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가 되게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먼저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마음, 하느님의 얼굴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의 기본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교회에 처음 올 때 듣는 말씀과 기도

매일 듣는 말씀과 기도,

교회 올 때마다 듣는 말씀과 기도,

너무나 자주 듣기 때문에 흔하게 들리는 말씀과 기도,

그러나 여러분,

말씀과 기도가 아니면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 아니고서 다른 지름길은 없는 것입니다.

가난은 물질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가난해져야 합니다.

하느님 은혜에 대해서는 늘 주리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이

우리 교회 공동체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누명을 쓰고 고통을 겪으면 하늘에서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명쓰고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올해는 하늘에서 받는 상에 도전해보시기를 권하고 바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임하셨고

다스리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