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9일 맥추감사주일
신명 8:1-4, 시편 119:33-48, 히브 11:32-40, 마태 6:25-34
올 한해 상반기를 마치고 시작되는 하반기에 연초에 계획하신 일들이 잘 되시고 하느님과 더 깊은 만남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봉헌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에서 맥추절은 칠칠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리추수가 아니라 밀의 추수라고 합니다. 밀의 첫 수확물을 봉헌하는 날입니다. 밀곡식을 처음 거두어 들일 때 추수절을 지켜라 (출34:22)-가을에는 초막절을 지켜라-
유대인들은 유대력 1월 15일이 안식일이고 그 다음 날 안식일 이튿날인 1월 16일이 “밀의 첫 열매, 첫 한 단”을 바치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 밀을 볶아서 가루로 만들어 제단에 태워 바칩니다.(레23:10-15)
이 날은 유월절 이후 49일이 지난 날, 7일이 일곱 번 지난 다음 날, 완전한 안식의 날입니다. 칠칠절, 오순절, 맥추절 다 한 날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9일이 지난 다음 날은 성령강림절에 해당합니다.
맥추절, 칠칠절, 이 구약의 절기가 신약에선 성령강림절입니다.
올해 성령강림절은 5월 28일이었어요.
원래 맥추절은 성령강림절에 해당합니다.
올해는 지난 주일인 7월 2일을 맥추절로 지킨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이모작을 하는데
한 해의 전반기는 보리, 밀을 수확하고, 후반기엔 쌀 수확을 합니다.
그래서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 시작하는 7월 첫주일을 맥추감사절로 지키는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1. 배고픔의 기억을 안고 달려가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30년대부터 6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5.16 즈음까지 태어나신 분들이 함께 자리하고 계십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60년대도 먹는 것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군것질이 예산에는 과수원이 많으니까 요맘때쯤에 과수원에서 사과를 솎으면 나오는 자두만한 파란 풋사과가 나오는 시기였어요.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가져온 풋사과가 교실마다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어요. 이것을 씹어 먹기도 하고 즙을 삼키고는 뱉아내기도 했습니다.
또 풀 같은 건데 껍질을 벗겨서 씹으면 신맛이 나던 것이 있었습니다. 산에 가서 직접 채취해오는 아이들도 있었고 시장에서 한묶음씩 팔기도 했는데 이것도 이 맘때쯤 등장하는 간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온전치 않은 것을 먹고 하다보니 배탈이 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학급회의 할 때 ‘풋과일을 먹지 말자.’
교실 앞, 칠판에도 ‘풋과일이나 불량식품을 먹지말자.’ 이렇게 씌여 있던 기억이 납니다.
1965년 박정희대통령 경제계발 5개년계획 1년차 표어가 ‘올해는 일하는 해’ 였습니다. 그 다음해는 ‘올해는 더 일하는 해’였습니다.
경부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시간 걸린다하면서 꿈에 부풀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70년 80년 경제성장이란 목표는 정부의 지원 아래 대기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했고 많은 성과를 올렸습니다.
대학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꿈이었고 대기업 사원이 되면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것을 당연시 했습니다. 나라의 경제가 발전되고 모두가 잘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노력과 대가를 치르는 것에는 배고프던 설움, 굶주림의 기억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마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여기에 온 나라가 한 마음이 되어서 일을 하고 또 일을 하고, 야근에, 특근에,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대기업에 다니는 가정에서 가장은 아이들이 잠들고 있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아이들이 잠들고 있는 늦은 밤에 퇴근했습니다. 그래서 아빠 얼굴을 보기 어려웠지요. 그래도 잘 살기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당연히 치러야하는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대기업 직원으로써 그런 불편쯤이야 하면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이 시기에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근로자들의 인권은 무시된 채, 채찍과 당근으로 담금질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경제 대국 10위에 들어섰습니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접어들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치러야했던 대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희생이었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경제 발전을 위한 수십년간의 노력과 수고로 그 목표에 매진하고자 달려가다 보니, 가정이 흔들리고 무너졌습니다.
세계에서 이혼율이 상위에 오른 결과를 안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혹독하고 아픈 대가를 치르고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 입니다.
일리노이대의 세계적인 심리학자 에드디너 교수는 150개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했는데 그 중 한국이 가장 충격적으로 낮은 최하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인 교수와 공동으로 수천명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다시 심층조사한 결과가 나왔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분석했더니 "한국사람들은 돈을 너무 중요시해서 사회적관계를 희생하고, 이것을 암묵적으로 당연시 합의"하는 인식이 기반이 돼어서, 돈이 사랑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보다 중요하다는 사회적 집단 최면이 원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2015년에 발표된 자료입니다.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웃픈 현실입니다.
현대 사회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사회 현상을 보시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것에 대해서 하느님은 ‘걱정하지 마라,
공중의 새를 봐라, 내가 먹인다.
들의 꽃을 봐라 내가 입힌다.‘
우리나라는 본문의 구절인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으로 치달아갔고 속수무책으로 쏟어져나온 문제들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2. 오늘 일용할 양식
본문에 ‘걱정하지 마라’, ‘걱정’ 이 들어간 표현이 다섯 번입니다.
하찮은 자연의 미물도 다 먹이시는데 하물며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 너희는 안 먹이실까 걱정하느냐? 걱정을 하지 마라, 왜 걱정하느냐?
간곡하게 설득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은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베푸신 섭리에서 드러납니다.
노예생활하던 히브리인들은 의식주에 대한 아무 대책없이 별 준비도 없는 상태로 에집트에서 급하게 나왔습니다.
에집트에서 나오면서부터 어디로 가는지, 의식주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가운데 광야로 들어갑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물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때 그때마다 모세를 통해서 필요한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매일 만나를 주셔서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메추라기를 주셔서 영양보충을 하고
바위를 쳐서 물을 먹었습니다.
만나는 하루치 분만 거두게 하셨고
안식일 전날엔 이틀치를 거두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치인데 욕심을 부리고 더 많이 거두면 썩어서 못먹고 버려야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하루분의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마라, 말씀하시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말씀하실 때는 이스라엘백성 광야생활 40년이란 경험을 염두에 두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4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
오늘 1독서, 신명기 8:3-4, 말씀입니다.
3.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
우리가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에 대해서 과도하게 염려하고 너무 걱정하며 사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성향이나 기질로 인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내면이 비어있는 심리적인 공허로 인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 이것을 믿고 활용하면
우리가 더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첫째는 2독서 히브리서에 열거한 많은 사람들,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옙타, 다윗, 사무엘,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다 하자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편하게 살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산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붙잡고 모두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은 끝내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이것을 찾아다니고 쫓아가는 삶이 아니겠지요.
눈에 보이는 현실의 만족이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관이고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리라고 보면서 오늘 맥추감사절에 되새겨 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고 거기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식입니다.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증 등 정신질환을 앓는 분들이 감사를 잘 안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가 정신질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요.
감사를 하면 후두엽에서 세로토닌이 생성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만족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갖게 합니다. 세로토닌이 균형을 이루면 숙면을 취하게 합니다.
자꾸 습관적으로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만한 것을 찾으면 감사드리기 어려우니 감사드리기로 결단하시고 감사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 본문 가운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원에서 같이 생활한 적 있는 독립교단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 분은 희년운동을 합니다. 희년사회를 실천하는 사람들 모임도 만들고 올해 1년을 희년법을 알리는데 봉헌하고 무료로 강의, 집회 등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청년 때, 나는 집을 안사고, 자동차도 없이 살겠다.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집 없는 사람들의 애환을 함께 겪어야 세입자 서민을 위한 희년사역을 가슴으로 할 수 있겠다. 생각했고, 자동차를 사지 않겠다는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함으로 서민들의 지치고 고달픈 얼굴을 마주대하고 희년사역을 하겠다는 결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주나 지방을 갈 때에도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오산 세마대 제자교회는 교회 자체적으로 제자훈련을 해마다 했습니다. 몇 달간 평일에 훈련을 받고 마지막으로 전도여행을 하는데 어려운 교회들에 가서 전도도 하고 돕는 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안동, 포항, 기장교회에 있을 때, 세 교회에 다 오셨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 교인들이 직장에서 1년에 한 번 있는 휴가를 3박4일간 더운 여름철, 같은 기간에 휴가를 내서 20-25명 정도 오시는 열정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 분들이 오시면 청소, 수리도 해주시고, 전도하고, 동네 분들 집에 방문도 하고, 기도도 함께 해주시고, 교회에 초대해서 음식도 대접하고 한 교회를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기부하고 섬겨주시고 돌아갑니다.
이 분들이 방문하면 그 한 해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혼자 하기 어려워서 못하고 있던 일,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주듯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사도행전 29장을 진행한다, 란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회거제공동체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 사는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삽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에 마음을 함께 하고 우선순위로 여기시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더 없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으로 이웃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더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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