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주일, 11월 12일
신명 8:1-10, 시편65, 야고 1:17-18, 21-27, 마태6:25-33
<영적 생활의 은혜, 감사입니다.>
지난 여름 폭염이 있었고 비도 많이 왔고해서 쌀 수확이 어떻게 될까 했는데
감사하게도 풍년이랍니다.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에 가면 언제부터인지 하얀색 마시멜로 같은 것이 쌓여져있는 것을 봅니다.
볏단을 모아서 겉에 비닐로 둘러져있는데 이것을 ‘곤포 사일리지’,라고 합니다.
이 볏단은 소 먹이로 쓴다고 하지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가을걷이 수확할 때 많이 되뇌이는 시가 있습니다.
체코에서 태어난 시인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란 시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마지막 단락이 있는데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1. 감사는 내재되어있는 본능
더위, 폭염, 홍수 등등 천재가 있었지만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햇볕과 비와 바람 등 날씨와 모든 것을 주관하신 하느님께 영광돌려드리며 감사드립니다.
우리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는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본능과 같습니다.
고대에서부터 곡식을 수확하면 하늘에 감사드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가 우리나라 고대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고조선 이후에는 곡식을 수확한 후에 마을 부족이 함께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며칠간 축제를 벌였는데 이것을 추석의 유래로 봅니다.
고구려는 동맹이라 했고, 부여는 영고, 동예는 무천이라고 하는데 하늘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제를 지냈습니다.
농사를 사람이 지었지만 사람의 힘만으로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를 지냈습니다.
추석과 같은 명절은 농경사회의 문화이면서 가정에 중요한 구심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말씀드린대로 우리나라에서 추수감사절은 추석에 가까운 주일,
추석 그 다음 주일 쯤, 추수감사절로 드리는 것이 우리 풍습과 의미에서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한국교회에서는 초막절과 추석을 연관해서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구약 레위기는 율법가운데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레위기에서 다섯 가지 제사가 나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 다섯 가지인데
이중에 화목제가 감사제사에 해당합니다.
사이가 화목하다. 화할화和, 화목할목睦자, 화목입니다.
③화목제(친교제): 화목제는 히브리말로 '셀렘'입니다. '샬롬'과 같은 의미입니다.
'평화 또는 온전함'을 뜻합니다. 셀렘, 샬롬, 같은 의미를 갖는 비슷한 언어가 여러 나라에 있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살루마’,라고 인사합니다.
필리핀 다갈로그어로 고마워는 ‘살라맛’이라고 합니다.
조사해보면 더 많은 나라에 이런 언어구성으로 된 인사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화목제는 세 가지 경우에 드렸습니다.
첫째, 서원이 이루어졌을 때 드렸습니다. 유명한 서원제는 자식이 없던 한나가 사무엘을 얻었을 때 실로에 가서 드린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입니다. 자신이 원하던 바램을 기도 드리면서 그것이 이루어진 것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감사할 일이 있을 때 드렸습니다. 그래서 감사제사라고도 합니다.
셋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스스로 원해서 (자원제)-자발적으로 드렸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하느님과 인간, 신자와 신자, 신자와 이웃과의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2. 광야로 이끄신 하느님
오늘 1독서 신명기 8장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방법을 알게 하시는 내용이 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430년간 노예생활하던 에집트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갑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들입니다.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안락하게 쉴 수 있는 집도 없습니다. 밤에는 맹수들이 출몰하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광야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
광야에 들어간 이스라엘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 가운데 지냅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배고픈 시절,
이것이 광야에서 겪는 경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하느님께서 쓰시려는 사람에게는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나라에는 광야라고 할 곳이 없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이 갔던 그런 지리적 여건의 광야가 아니라 하느님의 방법으로 사람과의 관계나 주변 상황을 다 막으시고 혼자 고립된 것 같이 광야의 환경으로 이끄십니다. 외로움과 단절감 속에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곤고해지고 혼자 지내는 상황, 마치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것처럼
자신을 보게하시고 자신의 실제모습을 보고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이 광야의 상황이고 광야의 훈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쓰시려는 사람에게 특별한 기간 광야의 훈련을 하게 하시지만
결국 인생 자체가 광야 생활입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 교육받고 가정에서 교육받고 사람들과 만나고 하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인생에 대해서 한 가지 한 가지 배우면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렇게 하면 안되는구나.
이 광야의 삶을 사는데 어떤 사람은 내 주먹을 믿지, 하면서
맨몸으로 불에도 뛰어들고, 물에도 뛰어들고 하다가 낭패를 하게 됩니다.
이사야서 4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수많은 인생들 가운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깨닫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에 맞춰 살 것을 결단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성도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배가 고프니까 정신이 혼미해져서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떠올리면서 거기서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거기서 나와서 이 고생을 한다. 그렇게 헛소리를 하면서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럴 때마다 모세가 하느님께 나와서 어찌합니까? 하느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대로 하면서 겨우 마음 잡고 위태한 순간을 지나곤 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다 내려놓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을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이때 하신 말씀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3. 영적인 갈망
빵은 육적인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원망하고 에집트를 동경하고
이럴 때 빵을 주면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빵을 더 먹기 위해서, 더 차지 하기 위해서 싸움과 갈등이 일어날 것입니다.
빵은 눈에 보이고 입에 넣으면 배 부르고 육신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빵 달라 배고프다, 빵만 있으면 될 것 같다. 하는 생각, 그런 행동은
일반적으로 육의 생각이고 세상의 관점이고 세상적인 삶입니다.
일반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고 가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상황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배고픈 기간, 굶주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신 것은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 집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광야에 들어오자 마자 바로 먹을 것을 주셨다면 하느님과는 상관없이 살았을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 영적인 존재인 것을 광야에서 배고픈 시간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지난 번 아침에 시편 묵상 가운데 꿀보다 송이꿀 보다 더 달다 시19편
성경 말씀이 이렇게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 이 맛을 경험해야 만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게 됩니다.
성경을 우리가 매일 먹는 식사, 밥을 먹는 것처럼
시편 1편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시편 1편 2-3절입니다.
시편 1편을 묵상하시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영적인 양식으로 강건케 하십니다.
지지난 주일에 정목사님께서 우리 교회 선교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우리교회가 해야 할 과제로 전례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또 한 가지는 영적인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누가 오시는 것은 영적인 것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찾는 것이지요.
누군가 왔을 때 다른 것 보다, 세상에서 느끼지 못한 것
역시 교회라서 다르구나,
영적인 분위기를 느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분위기나 행동을 통해서 느끼게 될 터인데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께 감사가 있으면 그 감사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흘러나올 것입니다.
습관처럼 행하는 생활, 습관처럼 감사드리는 생활
하느님께 매일 매순간 감사드리는 생활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4. 사람은 영적인 존재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은 1독서인 신명기 8장과 연관되는 말씀입니다.
신명기에서 광야에서 육신의 굶주림이 하느님을 보게하기 위한 필요한 경험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육신의 굶주림과는 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을 도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결과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갖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과 상관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이것은 영적인 깨어남, 영적인 생활, 영적인 성장을 위해 필요합니다.
새해가 될 때, 3일간 금식이나 하루 한끼 금식 등
예전에는 많이 해왔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금식, 침묵이나 묵상 등 다른 때보다 장려하는 이유가
육신에 영향을 주는 감정, 느낌, 감각 등을 최대한 적게 활동하도록, 잠잠하게 한다면 영적인 감각이 깨어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영적 생활하면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일반적인 시간하고 다른 시간입니다.
기도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어야 영적인 세계가 점점 확장되어갈 것입니다.
영적인 깊이도 더 깊어집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날마다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
그 양식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에 감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개인적인 만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기도와 말씀묵상으로 영적으로 깨어나도록 시간을 들이고
하느님을 가까이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자, 나를 높이 받드는 자이니,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 시50편 23절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어있으라 (1) | 2023.12.03 |
---|---|
나와 함께 계신 주님, 이웃과 함께 계시는 주님 (0) | 2023.11.26 |
이웃사랑,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 (1) | 2023.10.30 |
초청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1) | 2023.10.15 |
추석과 초막절 (0) | 2023.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