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1일 대림3주일
이사 35:1-10, 시편 146:5-10, 야고 5:7-10, 마태 11:2-11,
10월 27일부터 시작된 우리 교회 리모델링공사가 이제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한달 보름정도 시간이 걸리는 공사였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낡은 건물이다보니 손길이 닿으면 그 옆에 나무가 썩은 것이 보이고, 그러면 그냥 둘 수 없으니까 새 것으로 바꾸고, 그러다 보니 계획보다 기간이 더 늘어났습니다.
공사기간이나 손 댈 부분이 많아지니 재정이 더 들어가지만 새롭게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다 완성되었을 때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설레임과 기쁨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교회 리모델링을 하면서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기다림이
대림절의 기다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다림은 어떤 결과를 앞두고 있는 기간이고 과정입니다.
결과만 중요하고 과정은 중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과정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중요합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우리 교회공동체는 여러 가지 추억을 만들었고, 이제 이 경험들이 우리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1. 대림절과 세례요한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의 특징은 세례요한의 등장입니다.
대림절과 세례요한은 딱 맞는 컨셉입니다.
대림절기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이고요,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광야에서 외치는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헤로데왕이 자기 동생이 로마에 볼 일 보러 간 사이에 동생의 아내를 데려와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이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러 차례 헤롯왕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른 말하는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둡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지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볼 때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예수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메시아를 두고 세례요한이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신 분이다. 그래서 잘못을 철저히 판단하고 심판하실 것이다.
심판하시러 오신 예수님이시니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여러 날이 지나도 예수님이 안오시는 겁니다.
들리는 소리는 예수님이 병자들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감옥에 그대로 두시나, 생각했습니다.
요한에게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알아봐라, 질문을 합니다.
“오실 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세례요한은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태중의 아이, 요한이 마리아의 음성을 듣고 뱃속에서 좋아서 뛰었다고 복음서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감옥에 있는 자신을 그대로 두니까 ‘그럼 이 분이 아니신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하나?’
뭔가 헷갈리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합니다.
세례요한을 가리켜 마지막 예언자라고 하는데
감옥에 갇히니 그도 인간인지라 조급해져서 메시아의 격려를 기대하고 제자들을 보낸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2. 대림절의 은혜
어쨌든 기다림,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기다림에 대해서 늘 말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의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기다림을 익숙하게 감당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언약을 갖고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너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의 나이 75살에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다가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시간도 흐르고 나이가 이렇게 들었는데 하느님의 약속이 언제 이뤄지겠냐 하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몸종을 스스로 취해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자손은 25년이 지난 후, 백 살에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의 특징은 때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이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의 관점이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초월한 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라 말씀하셔서 노아는 방주를 만듭니다.
오랜시간이 걸린 것은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계획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 하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완악해져서 노아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취급 했을 것입니다. 그럴만한 것이 배를 만든 기간이 120년간 걸렸습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는데 십년이 지나고 십오년이 지나니까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이 들자, 약속을 깨뜨립니다. 하느님의 주권아래에서 자식을 주실 것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생각했던 한계점에 이른 것입니다.
해도 너무하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한계적인 상황이 들자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식을 얻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다가 포기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이런 것을 타협이라고 하지요.
예수님 믿으면 이제 새로운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을 듣고 알고 그렇게 하려고 하다가, 어느 순간에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는 내려놓고 예전의 습관, 예전의 행동, 예전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익숙하지 않으니 부딪히고 소화가 안되고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옛 것은 익숙하니 편리하지요.
이런 우리의 연약함과 안일함에서 대림절은 눈을 뜨고 깨어나는 절기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노력하고 애써야합니다.
제주교회 대림절 신앙강좌에서 기억에 남은 강사님 말씀은
‘신앙은 노력하는 것입니다.’
대림절 전례색깔이 자색인 것은 통회하고 회개하고 성찰하고 깨어나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잘못과 허물을 뉘우치고 왜곡되고 비틀린 내면을 회복하고 깨끗하게 준비해서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대림절의 은혜를 입으시길 축복합니다.
3. 세례요한 보다 큰 사람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그렇다 내가 메시아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5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이사 61:1).”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
여섯 부류의 삶의 질곡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이 뒤틀린 모든 질병에서 정상으로 회복케하는 사역을 통해서 메시아를 증거하란 말씀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들에서 사랑과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메시아라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영적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기간에 믿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세례요한은 마지막이면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 선지자 보다 나은 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은 여자들이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자다.
그는 탄생에서부터 특별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와서 인사하는 목소리를 듣고 기뻐서 어머니 뱃속에서 뛰어놀았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특별한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여자들이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는 세례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고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
이 세상에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큰 사람인데 천국에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세례요한보다 큰 사람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천국의 가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세례요한과 같이 태어난 사람도 없고 예수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유일하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전무후무하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면, 일단 천국에 들어가면 세례요한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였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런 것이고 천국에서는 그 정도는 가장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하느님의 보좌 앞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면서 천사들이 시중을 든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예수님의 보혈을 증거하는 것이 천국 전체에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허물을 고백하는 것은 내가 지은 이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렇다 너의 죄 때문에 내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렸다.’ 하느님께서 하신 이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자꾸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더 드러나고 자꾸 드러납니다.
하느님께는 ‘내가 너의 죄 때문에 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야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천국에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과 영화로움이 가득합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들이 차지하느냐, 침노하는 자들이 차지한다.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침노하는 자란 의미는 스스로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노력하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침노는 폭행해서 빼앗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굉장히 적극적으로 빼앗다시피 사모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봉사든, 헌신이든, 선행이든, 아주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쌓아놓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들어가면 세례요한 보다 더 클 것이다.’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 그 때에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축복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죄와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 자꾸 드러내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은혜를 입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드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나의 행실과 생각과 모든 것도 함께 못박혔습니다.
2독서 야고보서로 마무리합니다.
7 ¶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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