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5주일 2월5일
이사 58:1-12, 시편 112:1-9, 1고린 2:1-12, 마태 5:13-20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오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앞에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직접 ‘너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라고 하신 산 위에 모여있는 사람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그 무리 안에 섞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머리로나 마음으로 상황을 그려보시며 이 시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1. 존재를 뒤흔들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많이 들어본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어쩌면 할 말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모자랍니다.’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근데 소금과 빛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대해서는
아멘~ 이라고 답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면
너무 부담을 드리는 것 아닌가,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왜 수용해야만 하는지, 하는 것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소금과 빛이 우리의 목표로 정해져서, 그 목표를 향해 나가는 상황으로 이해할 때는 ‘아직은’이라고 반응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은 소금이라고 하기에는 미미하지만, 지금은 빛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이런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명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금과 빛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존재를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2. 소금과 빛이다
왜 소금이라고 하셨을까요?
첫째 소금은 ᄊᅠᆨ지 않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금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원래의 모습을 지켜가도록 해야할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패에서 지켜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지금의 사회,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소금의 역할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고 그리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첫번째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한 예로써 우리가 잘 아시는 봐와 같이 구약 창세기에서 소돔땅을 멸하신다는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중재합니다.
저 곳에 의인이 오십명이 있어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의인 오십명을 봐서 안하겠다.
저 곳에 의인이 45명이 있어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의인 45명을 봐서 안하겠다.
처음에 오십명, 다음에 45명, 다음에 40명, 30명, 20명, 마지막으로 열 명을 아브라함이 제시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돔땅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서 유황불로 멸망했습니다. 즉 열 명의 의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소금과 같아야한다는 것은 의인 열 명이 있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그 영향력같은 것입니다.
소금과 같은 성도, 소금과 같은 교회의 영향이 한 지역 사회에서 얼마나 중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그런 효과를 가져오는가를 창세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소금의 두 번째 기능은 스스로 희생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 없어짐으로 맛을 냅니다.
그리스도인은 희생을 통하여 새로운 맛, 새로운 생명력을 이웃에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이타종교라고 합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종교란 뜻입니다.
이타적으로 사는 사람은 지혜가 있고 삶을 풍성하게 산다고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소금은 덜 짜다든가, 소금이 되기 전 상태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소금은 짭니다. 짠맛이 덜해서 버려지는 소금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소금은 짠맛에서 완전합니다.
소금의 기능과 역할은 완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메시지는 상당히 강력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과 함께 따라오는 또 하나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르셨습니다.
세상은 어떤 곳이에요? 한 마디로 하면 어둠입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중반
“모든 것은 말씀으로 생겨났고 생겨난 것 중에 그분 없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빛이라고 하신 것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요한 1장 13절
예수님을 마음에 맞아들임으로 하느님에게서 난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과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세상을 향해, 세상의 어둠을 향해 올바른 지표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기에 빛입니다.
3. 세상 속에서
지금의 이 세상을 가리켜 말세지말이다.
말세에서도 마지막 시대라고 합니다.
지금 세상의 풍조와 세태는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연일 발생합니다.
세상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깜깜한 어둠이고 그 살아가는 모습을
우왕좌왕, 천방지축, 좌충우돌
이런 사자성어가 인생과 이 세상을 잘 표현해준다고 봅니다.
어디가 길인지 모르고 안 보이니까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힙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분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났기에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은
우리가 수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타종교. 정신은 이타주의입니다.
이것의 반대가 뭡니까?
이기주의, 자기자신만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의 결과가 우리나라 미래에 타격을 주는 저출산같은 것입니다.
요즘 보면 나라의 미래 같은 것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아요.
당장 내가 불편한 것을 못 참고 싫어하고 내가 편해야 되니까 애기를 안낳아요.
또 교육시키는데 돈이 많이 든다고 애를 안 낳아요.
한 아이 교육시키는데 5억인지 몇억인지 든다고 입을 떡 벌리고 돈이 너무 드니까 애를 안낳는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자식을 낳고 교육시키는 걸 당연히 여기고 걱정말고 공부해라.
하면서 자식을 키웠는데 한 아이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드는 돈을 계산해서
몇 억, 지금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처럼 너무 돈이 많이 든다고 입이 쩍 벌어져서 아무것도 안하는게 낫다
서울이 무섭다고 과천에서부터 기어간다는 속담처럼
스스로 속임을 당하는 현 시대의 얄팍한 경제논리와 똑똑하다는 처세가
어리석게하는 어둠이고 혼란이고 방황인 것입니다.
교회들이 저출산에 대해서 아무소리를 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들이 너무나 무기력해진 것 같습니다.
그간 교회건축에 열을 내고 대형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들의 부정과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너무 많이 보여왔습니다.
개독, 먹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4.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오리라
이사야 1독서 말씀 가운데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주고
.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준다면,
.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오리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최후의 심판이란 제목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든 사람을 불러놓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고 하십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
오른 편에 사람들이 “언제 주님이 그러셨어요?” 되물어요.
“너희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보듯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입으로는 하느님을 경배한다, 하느님을 위해서 등 좋은 소리를 하면서 행동으론 전혀 그렇지 못한 종교지도자들의 삶을 보면서 너무나 배신감에 떨고 마음에 꼭 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소금과 빛의 결론처럼 그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전해져옵니다.
연초에 경남mbc에서 인물다큐를 2회에 걸쳐 방영했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 지금까지 sns상에서 화제입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했고 남의 집 머슴으로 갔는데 19살에 한약사 시험에 합격해서 한약방을 차려서 60년가까이 했습니다.
좋은 약재를 싸게 해주고 약효가 좋다고 소문나면서 전국에서 몰려들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23살부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어요.
40살에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세우고 국가에 헌납하고 그간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천명가까이 되고 학생들 가운데 대학교수들도 수두룩해요. 기자가 따져보니 장학금이 수백억된다고 합니다. 진주라는 한 소도시를 60년간 양육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 것 같아요.
이 영상을 보면서 훌륭한 분이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부끄러워요.
이분의 평생의 삶을 보면서 교회가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지요.
교회 안다녀도 예수님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렇게 훌륭하게 자기 것 내어주고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대로 이 분은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자동차도 없이 자전거타고 다니면서
아프고 돈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돈을 벌었는데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회가 도전을 받으라고 이런 분이 계시게 하셨나보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5. 우리의 근원은 하느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은 가장 쓸모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짠맛을 낼 때 쓸모있고
빛이 가려지지 않고 온 누리를 비출 때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
우리 요한공동체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있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소금과 빛이면 세상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과 빛인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소금과 빛의 특징은 일회적이거나 이벤트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꾸준히 인내하면서 성실하게 지속적인 행함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작거나 크거나 가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금과 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 자체를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근원이 하느님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차원이 다르고 차원이 높은 소금과 빛입니다.
요한 교회 공동체 여러분
소금와 빛으로 살기로 결단하시길 축복합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므로써 하느님께 영광돌려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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