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버지의 자녀

유테레사 2023. 2. 19. 20:28

219일 연중7주일

레위 19:1-2, 9-18, 시편 119:33-40, 1고린 3:10-11, 16-23, 마태 5:38-48

 

<나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요즘에 넷플릭스로 방영하는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인기라고 합니다.

이 드라마를 패러디한 영상도 자주 나오고 기사도 많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내용은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드라마입니다. 피해자가 괴롭힌 가해자한테 복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올인하는 드라마라고 합니다. 복수하는 소재는 드라마나 영화나 인기가 있습니다.

더 글로리란 이 드라마가 인기있는 이유는 학교 안에 실제적으로 이런 일이 늘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또한 이렇게 학교 폭력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도 있지만

살아오면서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그래서 억울함과 분노, 마음에 응어리진 아픔과 상처 등을 경험한 채, 마음에 묻어두고 그냥 살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복수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과 분위기, 대사, 방법 등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하고 있다. 대리만족을 해주기에 인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론 가해를 한 것보다 피해를 입은 상처를 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드라마 제목이 더 글로리입니다.

작가의 말이 폭력의 순간에는 존엄, 명예, 영광 같은 것을 잃게 되는데 사과를 받아내는 때에 영광의 순간이라고 생각해서 제목을 더 글로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본문 서두에서 구약 레위기와 신명기 등 율법을 언급하십니다.

레위기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주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동해복수법, 같은 죄에 대해서 같은 벌로 복수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동해복수, 눈을 다치게 했으면 똑같이 눈을 상하게 하고

앞 이를 부러뜨렸으면 똑 같이 앞 이를 부러뜨려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동해복수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폭력의 강물, 악한 마음에서 생겨날 수 있는 예상되는 행동들에 대한 방파제역할을 하도록 율법을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집트에서 사는 동안은 에집트 관리가 늘 곁에 지켜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를 했을 것입니다. 지시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보호이기도 하고 질서이기도 했습니다.

에집트에서 탈출하고 광야에 들어서면서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과 무질서, 방종 상태 가운데 처해 있었다고 봅니다. 스스로 질서를 지켜가야 하는데

아직 에집트 노예생활에 익숙한 상황입니다.

 

누군가 육신적으로 힘있는 사람이 공동체의 질서를 안지키게 되면 약한 사람이 다치거나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의 동해복수법은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정의를 지켜가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제재를 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이루어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에서 나온 율법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앙갚음, 말로 표현하긴 뭣하지만 우리는 앙갚음에 대한 유혹이 늘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리사이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복수해도 좋다. 너에게 해를 끼쳤으니 복수해라.

이렇게 알고 가르쳐왔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타나서 앙갚음하지 마라,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이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이제까지 자신들의 가치관과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 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다. 우리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그것 하나를 위해 살아왔는데

그것이 다 뒤집어지는 것 같으니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세상을 지으실 때 하느님과 함께 하신 분입니다.

나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보통 우리 생활 속에서

지나다가 누가 오른뺨을 치면 어떻게 할까요?

경찰에 폭행죄로 신고하고 난리가 나겠지요.

우리의 삶에서 모든 관심은 나에게, 나 중심으로 내게 집중하면서 삽니다.

늘 무언가에 대해서 방어하면서 공격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군가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손해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대처를 하는 것이 사회생활이고 자아형성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사는 방법이라고,  그렇게 알고 살아온 것이

우리가 인정해야하는 이 세상살아가는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이런 삶의 실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웃을 사랑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내면의 모습이고 사랑하기에 우리 마음이 빈곤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능력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여러 모양으로 이렇게 저렇게 이곳에서 저곳에서 사랑을 요구 해오는데 줄 사랑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런 모습을 모르실 리가 없으시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으로 가르쳐온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상속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를 위해, 공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방향을 돌려 하느님을 찾아라. 하느님을 향해 오라

외칠 때 예언자들은 환영받기 보다는 환영받지 못했고 환영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을 대신해 대언을 외치는 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하느님께 반역을 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계속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공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은 예언자 계열에 오르는 위대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당장에 어떤 이익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의를 위해 애쓰다가 핍박을 받는 것은 예언자와 같은 위대한 삶이라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나에게 폭력을 하고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줬던 사람들에게

앙갚음 하지 말아라.

이 말씀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도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로 방점을 찍게 됩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냐면

마음에 드는 사람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끊임없이 구분해서 판단하고

내 마음 밖으로 몰아내는 일에 에너지를 얼마나 허비하는지 모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겐 눈길을 한번이라도 더 주면서 좋아하는 표시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눈길 주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너무나 인색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네편 내편 갈라놓지 않습니다.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것에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게 하시는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전에 예수원 목장에서 넉 달지낸 적이 있는데

목장 아래에 피재라는 고개가 해발 910고지이니까 목장은 천미터 가까이 되겠지요.

아침 밥하는 시간에 해가 뜹니다.

밥하다가 얼른 뛰어나와서 동편을 바라보면

저 앞에 동해바다쪽에서 해가 떠올라서 그 빛을 온누리에 좍 비치는데

마음이 벅차고 감동입니다.

오묘한 빛에 비치는 자연들, 오케스트라 연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1년에 한번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 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특별한 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 장관을 연출하시는 겁니다.

그 엄청난 스케일의 일출을 몇 사람도 아니고

어떤 때는 저 혼자 보고 있는 겁니다.

저 혼자 보라고 그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하느님께서 연출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때 저는 하느님은 성실하시다. 성실하신 하느님,

하느님은 진실하시다. 진실하신 하느님,

하느님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겁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신 성품이 제 생각과 마음에 새겨지고 제 안에 들어오시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똑같이 햇빛을 주셔서 곡식을 자라게하시고 야채를 자라게 하셔서

수확하고 양식으로 먹여 주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아버지의 성품입니다.

자녀는 낳고 길러주신 부모의 성품을 본받으며 자랍니다.

부모의 삶과 사랑을 양식으로 먹으며 자랍니다.

사랑이신 아버지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무모하고 너무나 도전적인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의 자녀는 아버지의 성품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이 땅에 계속 연장되도록

드러나고 나타내도록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아멘 하고 순종하면서

축복하고 기도하면 하느님의 성품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세리와 이방인은 죄인으로 여기고 공동체에서 상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는 죄인과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거제요한공동체 여러분,

아버지의 자녀임을 확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의 성품이 내 삶 속에서 드러나고 나타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서 아버지의 나라를 바라보고

미래에 그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의 자녀로 사시길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아버지가 누구에게나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주시지 않느냐?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도 아버지의 나라에 살아가는 기본 마인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위를 향해서 하늘을 향해서 아버지의 시선에 맞추고 아버지의 관점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와 함께 그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그 나라를 확장하며, 그 나라를 향해 가시는 요한공동체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