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8일 연중4주일
신명 18:15-20, 시111, 고전 8:1-13, 마르코 1:21-28
<예수님의 권위 안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듣고 놀랍니다.
늘 들어왔던 율법학자들과 다르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제자들과 가파르나움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화입니다. 당시에 회당 의식은 기도, 찬양, 성경봉독, 그리고 설교 순서로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순서가 회당예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식일에 가파르나움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상당히 놀라워합니다.
가르치신 내용은 안 나와있어서 알 수 없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나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놀란 이유가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 달랐고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늘 들어왔던 율법학자들과 너무 다른 차원의 가르침에
‘놀랐다’는 것인데, 이 말의 원래 뜻은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분위기로 인해서 잠깐 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과 감동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가르침에 대한 이런 반응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의 반응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진심을 울리고, 듣는 이들의 마음과 영혼을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들의 상황이나 형편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이고 형식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는 지금 아이들 키우시는 분은 안계신데
이해를 위해서 말씀드리면 율법형 부모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마라. 하지마, 이런 부정형, 금지하는 것을 말하는 부모의 경우에,
그 말을 듣는 아이는 억압된다고 합니다. 내면이 억압되니까 어떤 기회가 오면 눌러놨던 것이 튀어 올라온다고 해요. 크게 불어서 바람이 절반 찬 풍선을 한쪽을 누르면 그 쪽의 눌린 공기가 다른 쪽으로 몰려가서 부풀어 올라오는 것처럼 저항을 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지 마라, 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것도 두 가지를 말해주고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기분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이 놀랬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복음서의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복음서마다 있는 오병이어 사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몰려오는 사람들이 남자만도 오천명,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만명, 이만명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가르침을 들으면서 뭔가 얻어갈 것이 있었기 때문에 몰려왔겠지요.
그래서 몰려오는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목자없는 양떼와 같다고 측은하게 보셨습니다.
‘목자없는 양떼’,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어느 사회나 리더는 목자입니다. 리더의 역할과 책임은 아주 막중합니다. 리더가 바르지 못하고 불의한 단체, 모임, 사회,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은 목자없는 양떼와 같습니다.
그러면 사회 전반적인 기류는 침체되고 우울하고,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다운됩니다.
각 각 속해있는 곳에 바른 목자가 세워지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권위는 어디서 왔을까요? 이 권위는 어떤 것일까요?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런 권위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지금도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우선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힘으로 누르는 권위주의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권력과 위력으로 억지로 내리누르는 강압적인 태도와 언행이 따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시대의 여러 가지 회자되는 일들이 그런 것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자발적이거나 자유로운 사고는 철저히 배척되고 억압과 통제로 대변되는 시대였습니다.
권위 그 자체는 우리가 존중해야 할 가치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권위는 하느님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과 일치하는 영향력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위로,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말씀으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일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현실적으로는 생활에 많은 제약을 가져오는 규제와 같았겠지요.
안식일에 해가 저물면 일을 하면 안되었고, 어느정도 거리는 갈 수 없었던 것등 그래서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죄를 범한다고 봤기 때문에 죄인의 심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1600년대 17세기 조선시대에 양반은 10%, 평민이 20%, 나머지 70%가 노비였다고 합니다. 세계역사적으로 보면 노비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서 전쟁에서 이기면 상대나라의 포로를 데려다가 노비로 쓰는데 조선시대는 자기나라 사람을 노비로 여기고 그렇게 대했다니 70%의 백성들은 목자없는 양떼로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고 살았다는 것에 놀랍고 서글프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인격을 존중하고 진심을 나누는 대화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합니다.예수님의 메시지는 위로였다고 봅니다.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하면서
진심과 진실에 대한 목마름에 생수로 적셔주는 만족함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를 지목하면,
예수님의 완전하신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오묘한 진리의 말씀이 듣는 이들의 영혼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권위와 능력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두운 삶 가운데 놓여있던 그들에게 태양빛 같은 강력한 빛으로 비추이게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중에 이 권위로 인한 강력한 영향력, 강력한 빛은 어둠 속에 숨어있던 더러운 악령이 더 이상 숨지 못하고 빛 가운데 드러나게 했습니다.
공허한 외침으로 믿음없는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귀를 때립니다.
맞는 소리이긴 하지만 듣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영적 세계의 통치자이신 주님의 권위에 악령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악령은 거기에 있던 사람들 중 아무도 모르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정확하게 말합니다.
‘입 다물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꾸짖으시자 악령은 발작과 큰 소리 지르며 떠나갑니다.
악령의 외침은 믿음이 아니요 예수님 사역을 방해하는 거짓이기에 꾸짖고 내어쫓는 것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누군가의 권유로 예수님 믿어볼까? 교회 가볼까? 그러면 곱게 교회가고 신앙생활 하게 되지 않는 경우를 보셨을 겁니다. 그 시간이 가까이 되면 희안한 일들이 생깁니다. 친구가 찾아오고, 교회가는 길에 접촉사고가 나고 갑자기 볼 일이 생기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둠이 빛이 비쳐지는 것에 반항해서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귀신을 내쫓는 것에 대해서 교회사가 하르낙은 귀신축출이 3세기까지 초대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은 권위있는 말씀에 놀라고,
악령이 굴복하는 것에 놀랍니다.
이전에 없던 일을 보았고 경험한 사람들은 그 신기한 일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갈릴래아에 두루 퍼졌습니다. 인터넷이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암울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마귀가 떠나갔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말씀을 듣는 중에 말씀의 권위에 힘을 못쓰고 쫓겨났다는 것은 그 분이 얼마나 신령한 분이냐?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인격에 우리의 인격이 만나면
빛 가운데 어둠이 드러나고 어둠에서 빛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의 변화, 회개가 일어납니다.
세상은 치열한 영적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싫든 좋든 영적싸움하며 살고 있습니다.
삶의 어두운 영역은 모든 병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질병이나 중독 등 이런 묶임을 어둠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이 상황과 문제를 말씀드리고
묶임이 끊어지기를 기도할 때 해방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의 권위, 예수님의 권위를 어떻게 지켜가고 세워가느냐,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안에서 말씀과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영적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이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독서 고린도전서 8장 말씀대로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향상시켜주는 것, 즉 변화하고 성장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변화하고 성장케 하는 사랑
율법학자들은 지식을 가르친다하면서 교만하였다면
예수님은 사랑이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 안에 따르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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