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9일 사순4주일 <영적인 눈이 띄여 빛의 자녀로 삽시다>
삼상18:1-13, 시23, 엡5:8-14, 요9:1-4
오늘 사순4주일은 장미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참회와 묵상으로 지키는 사순절 긴 시간에 중간지접인 오늘 위로하는 의미로어둡고 침침했던 제단도 분홍색 장미로 장식하고 제의도 분홍색으로 하는 전례전통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로 향하시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일요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며 신자생활을 하는 것이
그냥 교회만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9장도 지난 주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등장합니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는데 그 옆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가면서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봅니다.
제자들이 저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나면서,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할 경우에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팔자다. 팔자가 그렇게 타고 났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팔자기 때문에,
저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 많은 것이 담겨있습니다.
예전 우리나라에선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자식이 있으면 일단 숨기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 자식은 평생 집에만 있어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채, 대부분 그렇게 살아갔을 겁니다. 왜냐하면 시각장애인이 태어난 것을 집안의 수치로 여기면서 사람들 보기에 창피하고 뭔가가 있어서 벌 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런 삶과 가치관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오래전에 방영되었던 ‘전설따라 삼천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잘 등장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 힘이 없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한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구박당하다 죽음에 이르게 되면, 사무친 원한을 품고 귀신이나 어떤 다른 사물로 나타나서 하나같이 복수하는 내용들입니다.
용서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나라 세계관입니다.
지지난 주 두나미스세미나에 갔다왔는데 대신부님 성령론을 여섯 과정으로 해서
한 과정이 7-8강의로 진행되는데 첫 번 과정, 첫 번째 강의가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세계관은 가치관, 살아가는 사고방식 사고체계이지요.
앞에 닥친 어떤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
또 사물을 보는 관점과 이해하는 방식, 이런 것이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치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하느님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그곁에 있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아무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퉤 뱉으시더니 흙을 개어서 그 침하고 이겨진 흙을 그 사람의 눈에다 발라주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
실로암 연못(부산교구 어머니연합회 성가제에 우리교회어머니들이 부르시는 성가 중 하나가 실로암이란 제목의 노래입니다.)은 구약에서 히스기야 왕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예루살렘 동남쪽 성벽 바로 안에 있는 못이라고 합니다.
그 시각장애인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을 때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시각장애인인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끌고 가는 줄 알았던 사주팔자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런 간증은 찾아보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더듬거리며 다니던 이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다니니까 사람들이 그 시각장애인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눈을 뜰 리가 있나 다른 사람이지,
말이 많아지니까
‘내가 그 사람이요. 예수 라는 분이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보내고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묻고 했지만
‘예수란 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
이 사람은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시각장애인에게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문제를 찾는다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거만 가지고 죄인이라고 하기에는
소경이 눈을 뜬 사실이 지금 눈 앞에 현실인 것이 너무 분명하고 강력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로 자처하는 이 사람들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인정을 안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하느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서 하느님을 깨닫도록 하셨는데 사람들이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는데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인간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지만 실상은 어리석다.
본문 39절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 멀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로마서1장하고 같은 말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신들이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고 그 외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무시하고 판단하던 그 자만심이 예수님도 몰라보고 그들 스스로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만난 예수님게서 물으십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그 ㅁ너와 말하고 ldTsms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 믿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진정으로 눈이 뜨였습니다.
빛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해 있습니까? 빛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어둠의 나라, 사망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왔고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졌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에 빛의 열매는 선과 정의와 진실이라고 말씀합니다.
선과 정의와 진실, 우리가 추구해 가는 가치입니다.
지금의 이 시대는 마지막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이 가운데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 어렵고 힘듭니다.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둠을 거절하고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갖는 것이 처음부터 즐겁고 편안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익힌 지식과 살아온 경험이 있는데, 이것들이 더 익숙하고 편한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갖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경험과 지식에 대해서 늘 새로운 도전과 갈등을 갖게 합니다.
주관이 뚜렷할수록 그것이 더 강하고 방어랄까 수비를 단단히 하게 됩니다.
교회에 이제 입문하고 나이가 들을수록 신앙이란 새로운 이해와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 말씀입니다.
사울왕이 하느님으로부터 파면을 받고 사무엘 선지자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사무엘선지자에게 이새를 찾아가라 하십니다.
그에게 여덟 아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내가 봐뒀다.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찾아갑니다.
첫째 아들을 보니까 너무 잘 생겨서 마음이 혹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자가 바로 이 자구나. 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면 ‘너희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마음을 본다. 그는 아니다. 내 눈 밖에 났다.’
구약에 이스라엘의 지도자 가운데 사무엘은 독특합니다.
왕권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세 가지 권한을 다 갖고 있는 유일한 지도자로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조차도 얼짱, 외모에 혹했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는 수준은 외모, 얼짱, 몸짱, 죄를 지어도 얼짱이면 용서가 되는 것이 요즘 세상의 트랜드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눈으로 하는 판단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다른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우리가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성경보는 것, 그 외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찾고 구하고 그것이 생활 속에 계속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선지자가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봤는데 다 아니라고 해요.
그런데 막내가 있다 해서 데려와라.
왔는데 하느님께서 ‘이 아이다. 기름을 부어라’
오늘 시편 23편이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하느님을 경험한 다윗의 고백입니다.
영성학자인 분에게 어떤 신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잘 보는 것입니다.’
눈이 안보이면 안경쓰고 보고, 원시라 안보이면 돋보기 쓰면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사물의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고 성경보고 하느님과 가까울수록 영적인 눈이 뜨여서 영적인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 사순절이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바리사이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으로 주님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 소경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이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눈이 뜨여야 어둠과 빛을 식별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갑니다.
사순절의 주제는 절제와 회개입니다.
회개는 어둠에서 빛으로 삶의 모든 세계관을 변화하게 합니다.
사물을 보는 관점과 이해가 달라집니다.
사순절에 회개에 참여하시는 방법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는 회개가 있습니다. 또한 의지적으로 고해성사를 받음으로 하는 회개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의지도 인정하십니다.
모두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는 방법입니다.
모두 하느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무엇을 보실까요?
하느님은 우리 마음을 보십니다.
무릇 지킬 것은 네 마음이다.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마음이 마음대로 춤을 춥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주님을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시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만족입니다.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을 겪으실 때,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교회 공동체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 믿음이 내 안에서 진심으로 믿어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나의 팔자로 생각하고 묶여있던 모든 부정적인 굴레와 묶임이 끊어졌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합니다.
이미 그런 신분이 되었습니다.
삶 가운데 빛의 자녀된 신분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