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3일 부활3주일
사행2:14상, 36-41, 시116:1-4,12-19, 베전1:17-23, 루가24:13-35
<일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예수님 만남>
예루살렘에서 삼십리쯤 떨어진 데에 엠마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희랍어나 영어로 전부 엠마우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곳에 그런 마을지명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정황으로 봐서 타당한 두 군데가 있는데 거기가 엠마오 아니겠냐 이렇게 짐작을 한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과 두 제자가 만난 사건을 통해서 부활 후 엠마우스, 이렇게 연결해서 사용하는데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 후 엠마오라는 지방으로 가고 있던 제자들이 길을 가던 도중에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을 기념해서,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 가서 만남이나 모임, 휴가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실의에 빠져있는 두 사람의 제자가 가던 중에 알지 못하는 여행자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엠마우스에 도착했을 때 그 여행자에게"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물러주십시오" 했다가 그 여행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고 희망을 되찾은 곳이라고 해서, 지역 이름 외에 ‘가난한 이들에게 집과 식사를 제공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준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지난 주간에 부산교구 신부님들이 일본성공회 규슈교구를 방문했던 여행이 엠마우스에 해당합니다. 교구가 생긴이래 해외에 열 명이상 성직자들이 함께 갔던 적은 처음이라는데 여러 가지로 아주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 주변에는 열두 제자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늘 오거니 가거니 하면서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다. 일반 상식 안에서 보고 듣고 살아가는 이에겐 그동안 희망을 줄 거 같았던 예수님의 죽음은 어이없게 끝나고 만 허탈한 사건이었을 겁니다.
뭔가 해보겠다고 그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것을 다 접고 남은 삶을 고향에서 찾아보기로 결정하고 엠마오를 향해 가는 두 제자입니다.
이 두 사람의 심정은 삼일간의 사건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채, 여전히 대사제들과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나 들려지는 말을 들을 때 받았던 큰 충격의 여운이 그대로 이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하는 말이 패닉에 빠졌다. 패닉상태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는데도 눈으로 직접 주님을 보진 않았으니까 그냥 하는 헛소리처럼 흘려버린 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신 선생님에 대해서 아쉬움만 가득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겐 죽음으로 끝난 아까운 분으로 모든 소망도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4대 성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실제로 부활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요.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외치셨는데 이 말은 당시 그쪽지방의 공용어인 아람어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이 안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나는 이 일을 위해 왔다’ 이렇게 하는 번역이 원어에 가장 가까운 의미라고 합니다.
이 일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죽으셔야 했나?
여기에 대한 우리 각 자의 실제적 고백이 있고난 다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며 걸어가는데 그 곁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말을 걸으시는데 (넌센스) “무슨 일이냐?”
*대번에 예수님 인줄 알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예수님은 언제나 반말하시거든요.
우리나라 성경은 예수님은 언제나 반말하도록 번역했어요.
천주교 200주년 성경에는 존대말로 나옵니다.
전에 대신부님께서 왜 성경번역이 이렇게 되었냐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텐데 유교문화에 젖어서 번역을 그렇게 한 것은 우리나라 유교적 가치관과 관습이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보게됩니다.
예수님은 높은 분이고 윗사람이다. 또 하늘 상제의 아들이시다.
제자들은 아랫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높은 신분이어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신다
이런 논리에서 우리나라 성경에서 반말하시는 예수님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두 제자가 걸으면서 나자렛사람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으시는데 부활에 대해서 뜬소문처럼
천사가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을 하는데 정작 그 분은 못봤다고 합니다.
전해들은 얘기를 하는 동안 옆에 예수님을 전혀 못 알아봅니다.
들으시다가 그리스도에 대해 이해가 없는 것을 아시고
성경에 대한 예언을 하나 하나 가르쳐주시면서 전부 말씀하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두 제자가 저녁이 늦어지고 예수님께도 하루 묵어가시라고 권하면서 함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려고
주님이 빵을 들어서 감사드리시고 빵을 떼십니다.
우리 감사성찬례에서 대면병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고 빵을 떼는 시간이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때가 빵을 떼는 순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수난하신 전날 밤에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이 부분이 감사성찬례의 클라이막스입니다.
그 다음에 보혈이 담긴 잔을 들고 감사드립니다.
이때 기도문을 ‘성체제정사’라고 합니다.
빵을 떼는 그 순간에 두 제자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때서야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 봤습니다.
빵을 떼는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겪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샬이란 학자는 빵을 떼는 것에 신비한 능력이 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가 낯선 타인으로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랍비로만 생각했습니다. 빵을 떼는 만찬(晩餐), 성찬을 친교(코이노니아)라고 한다면 이 성찬의 친교 속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성체성사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주일에 드린 말씀대로 빵을 떼는 시간에 우리는 더욱 집중해서 이 제대에서 드려지는 성찬 전례를 주시하시면서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셔야 되겠습니다.
물론 이 제자들이 길에서 예수님과 같이 걸으면서 가르침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대접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성체를 받아모시기 전 말씀의 전례 가운데, 1독서와 시편, 2독서, 그리고 복음과 설교 등을 통해서 마음으로 준비하시고, 그리고 이어서 제대에서 일어나는 성찬의 신비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엠마오 길을 가는 과정입니다.
제자들의 눈이 떠져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에 예수님은 그 곳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활한 육신은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시공에 제한된 존재가 아닌 것은 방안에 있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함께 모여있는 제자들 가운데로 그냥 슥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하십니다. 죽으시기 전, 그 육신과는 다릅니다.
눈에 보이긴해도 제한되지 않고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 아침에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랍보니~ 부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다가갔겠지요.
예수님께서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마라.”
엠마오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은 낯선 나그네로 만났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목 마른 이웃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부활하시고 40일 지내시는 동안 이전처럼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지 않고
예수님은 홀로 따로 지내시면서
갈릴리에서 고기잡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고, 그 외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없이, 대상에 제한없이
지금도 우리 생활 가운데서 만날 수 있고 찾을 수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는 이 은혜가 예배 가운데, 모임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교회이고 그것이 교회의 생명이고 힘입니다.
또한 주님을 만남이 우리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엠마오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난 후, 고향을 향해 가던 목표가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습니다.
방향전환, 메타노이아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시간에 이미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을 수 없었겠지요.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두 제자가 도착했더니 열한 제자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 부활에 대한 얘기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던 차에
베드로가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얘기하고
이어서 엠마오 가던 길에서 경험한 예수님을 전합니다.
주님을 만나 성경에 대해서 상세하게 가르쳐주셨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떡을 뗄 때, 그 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했다.
그런 모든 경험을 함께 나누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확실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엠마오 가던 길의 두 제자를 포함해서 제자들의 남은 삶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삶의 방향이 예수님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이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눈이 열려서 부활의 소망을 안고 고향으로 가던 방향이 예루살렘으로 바뀌는 전환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의 지각이 깨이고 의식이 열려집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예수님 만남은 각 사람에게 그 일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후 부활의 영광을 입으신 것 처럼
대부분 고난 가운데 예수님을 만납니다.
베드로전서 2독서로 마무리합니다.
18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19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21 여러분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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